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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책 읽지 말라는 정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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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디렉터

신준봉 문화디렉터

최근 신문사 편집국에 배달된 ‘출판문화’ 9월호는 ‘지식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제목의 특집을 실었다. 정부의 내년 연구개발(R&D) 예산 대폭 감축안을 비판하는 글들을 묶었다. 출판문화는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발행하는 월간지다. 출협은 서울국제도서전 지원금 정산 문제 등을 두고 불과 두어 달 전까지 정부와 한껏 대립각을 세웠던 출판단체다. 감정의 앙금이 없진 않겠지만, 출협이 마침 잘 걸렸다는 심정만으로 특집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소설가 고(故) 박완서 선생의 딸인 호원경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신문 지면에서 볼 수 없는 긴 호흡의 글로 R&D 삭감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서동진 계원예대 교수는 ‘문과’로 튄 불똥을 전했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26개 연구기관의 연구비가 일률적으로 30% 줄어들게 생겼다는 것이다.

독서 진흥 등 내년 예산 큰 폭 줄여
거액 R&D 예산 견줘 초라한 수준
‘출판=사양산업’ 인상 주지 말아야

결이 살짝 다르지만, 묵직한 인문서를 선보여 온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은 “우리 사회의 지적 인프라 구조 자체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셈”이라고 요즘 인문학술 출판계가 처한 현실을 진단했다. 학자들은 임용·승진에 매몰돼 대중적으로 의미 있는 학술서를 쓰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언론계가 학술기사를 소홀히 한 탓에 그나마 탄탄한 교수 필자가 ‘발견’되지 못하는 사이, 출판계의 인문학술 전문 편집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R&D 예산과 인문학술 출판만 문제인 걸까. ‘출판 일반’으로 시야를 넓혀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역시 정부의 내년 예산안 때문이다. 정부안대로라면 출판산업 분야 내년 예산이 크게 바뀐다. 신설되는 사업도 있지만, 예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사업도 있다. 대표적으로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이라는, 올해 59억원이 책정된 계정 자체가 내년에는 사라진다. 어린이를 위한 북스타트 등 예산이 없어지는 11개 독서 진흥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상임이사는 “15년째 독서 진흥에 매달리고 있는데, 역대급 예산안 변화다.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했다. 현 정부는 책 읽지 말라는 정부 아니냐는 거다.

문학나눔 사업은 쪼그라든다. 이미 출간된 시·소설 등 문학책 가운데 ‘양질’을 선정해 종당 850만원어치씩 정부가 사주는 사업이다. 작가로서는 문학성을 ‘공인’받는 효과가 난다. 출판사에 면이 서고, 그렇게 되면 후속작 출간이 수월해진다. 이 사업 예산이 20억원 줄어든다. 한 출판인은 “금액의 크기보다 상징적인 타격이 크다”고 했다.

정부도 할 말은 있어 보인다. 한 문체부 관계자는 “전체적인 예산 감축 기조에 따라 평소보다 효율성을 신경 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감사에 걸렸거나 저평가받은 사업을 가지쳐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체부 관계자는 “개별 사업 직접 지원보다 시스템 개선 쪽의 방향 변화로 봐 달라”고 했다. 가령 중소 출판사 성장을 돕는 사업을 신설해 30억원을 배정했다.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는 법 깨우치는 일을 돕겠다는 얘기다. 토 달기 어려운 논리다.

하지만 문체부 전체 예산을 들여다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K콘텐츠 펀드 출자액 등의 예산이 올해보다 81% 늘어난 3600억원이다. 한국 방문의 해 캠페인 등 관련 예산은 78% 늘려 178억원을 책정했다. 빠르게 돈 될 수 있는 사업이면 팍팍 밀어주겠다는 거 아닌가. 반면에 방만 운영, 낭비, 카르텔 요소를 따졌다며 2400억원을 삭감했다. 수조원 단위의 R&D 예산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인, 쪼그라든 출판산업 예산은 말하자면 낭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책도 결국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다. 정부가 국민 세금을 들여 사줘야 한다는 발상(문학나눔·세종도서)은 언뜻 직관에 반한다. 하지만 책의 공공성을 떠올리면 못할 일도 아니다. 한 출판인은 “정부의 내년 예산안이 출판은 사양산업, 책은 올드한 매체니까 지원을 줄인다는 신호로 독서 인구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문화적으로 좋을 게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