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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자궁 안에 정관이 있다고? 24년 만에 뜻 바꾼 국어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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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표준국어대사전 바로잡기 나선 박일환 시인

2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박일환씨가 전자칠판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 오류를 적으며 설명하고 있다. “상식 수준에서만 살펴봐도 1000개 이상의 오류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2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박일환씨가 전자칠판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 오류를 적으며 설명하고 있다. “상식 수준에서만 살펴봐도 1000개 이상의 오류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인 박일환(62)씨는 “국어사전을 보다 보니 어느 날 화가 나더라”고 했다. 신선한 시어(詩語)를 발굴할 요량으로 가까이 지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가 찾은 것은 숱한 오류와 허점이었다. 어떻게든 국어사전이 제자리를 잡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2015년 『미친 국어사전』을 시작으로 『국어사전 혼내는 책』(2019),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2020), 『국어사전 독립선언』(2022) 등을 연이어 펴내며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있다.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만난 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해 “최다 표제어 등에 집착한 성과주의의 산물”이라며 “오류로 점철된 국어사전을 ‘국가대표’ 사전으로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고 자인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대수술이 필요하다”면서다.

1999년 정부 편찬 첫 국어사전
최다 표제어 집착, 뜻풀이 오류

한자어 남발, 이해하기 어려워
온라인 ‘우리말샘’도 정비해야

영국처럼 다양한 예문 담아야
정치·지식인의 언어 파괴 심각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1999년 출간된 표준국어대사전은 정부가 직접 나서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1991년 설립된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이 92년부터 7년여에 걸쳐 500여 명의 인원과 112억원을 투입해 만들었다. 표제어 50여만 단어를 총 7328쪽에 담아낸 막대한 분량이다. 2008년부터는 종이사전 대신 인터넷 ‘웹사전’으로만 발간된다.

백과사전·일본사전 베낀 흔적

표준국어대사전의 최대 문제점은.
“수많은 한자어·외래어·전문어 등을 끌어와 표제어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면서 무성의한 뜻풀이를 남발한 것이다. 기존 백과사전이나 일본사전을 베낀 흔적도 많다. 이를테면 ‘전선병(여자의 긴 양말이 세로로 올이 풀리는 일)’ ‘몽롱체(시문·회화 따위에서, 명확한 의미나 윤곽 따위를 갖지 않은 것)’ 등 낯선 단어를 표제어로 올리고 일본사전의 뜻풀이를 표절하다시피 옮겨 적었다. 내용 자체가 틀린 경우도 여럿이다. ‘자궁’을 ‘여성의 정관의 일부가 발달하여 된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을 정도다. ‘정자가 이동하는 관’인 정관이 여성의 몸에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는 채소 ‘당근’의 사례를 ‘사전 뺑뺑이’를 해야 의미 파악이 가능한 뜻풀이의 예로 들었다.

‘당근: 산형과의 두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잎은 뿌리에서 나고 우상 복엽이다. 여름에 흰 꽃이 줄기 끝에 복산형 화서로 피고, 원뿔 모양의 불그레한 뿌리는 식용한다.’

‘우상’이 뭘까. 사전을 다시 검색해 ‘새의 깃 모양(羽狀)’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복산형’은 표제어로 수록돼 있지 않았고, ‘산형’도 없었다. 한자사전까지 찾아보고 나서야 ‘우산 모양’이란 ‘산형’의 뜻을 알게 됐다.

그는 “‘꽃차례’란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화서’라는 한자어를 썼다”며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펼쳤는데 이해가 안 된다면 이건 사전으로서 부적합”이라고 성토했다.

모범이 되지 못하는 ‘국가대표’ 사전

무엇이 가장 우려스러운가.
“국어사전을 보면 우리말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한국어에 대해 지레 겁먹고 주눅이 들게 한다. 또 국어사전의 난해한 뜻풀이가 어려운 말, 특히 한자나 영어가 더 수준 있는 언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쉬운 말이 더 좋은 말이라는 것, 말을 잘한다는 것은 간명하고 쉽고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는 것이란 걸 사전이 모범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신조어·방언 등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어휘를 보완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은 2016년부터 개방형 한국어 사전 ‘우리말샘’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우리말샘 표제어는 115만여 개에 이른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말이 다 우리말샘 표제어로 수록돼 있다. 유행어라고 볼 수도 없는, 곧 사라질 낱말도 다 갖다 뒀다. ‘몸매’가 들어간 표제어만 해도 극세사 몸매, 명품 몸매, 반전 몸매 등 수십 가지다. 줄임말도 엄청나게 많은데, 게임을 알지 못하다는 ‘게알못’, 배구를 알지 못하다는 ‘배알못’, 연애를 알지 못하다는 ‘연알못’ 등이 다 우리말샘의 표제어다. 다양한 어휘를 다루는 것도 좋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명확한 기준과 체계를 세워 집중해야 할 부분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전 아쉬워

외국의 국어사전은 어떤가.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1857년부터 71년에 걸쳐 1000명이 넘는 학자가 동원돼 1928년 초판이 완성됐다. 실제 문학작품이나 신문 기사에서 뽑아온 다양한 용례가 가장 큰 장점이다. 해당 단어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려면 예문을 많이 보여줘야 한다.”
또 추천할 만한 사전이라면.
“4000여만 부가 팔린 일본의 ‘신메이카이(新明解) 사전’의 뜻풀이도 좋은 모델이 된다. 개성 넘치는 표현으로 듣는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단어의 의미를 전달한다. 예컨대 ‘연애’에 대한 이 사전의 풀이는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고양된 기분으로 둘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고 싶지만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히거나 드물게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몸을 두는 것’이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이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으로 풀이한 단어다.”
오는 9일은 제577돌 한글날이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 파괴’가 논란이다.
“한글 파괴와 언어 파괴는 별개 문제다. 한글 파괴라고 하면 ‘멍멍이’를 ‘댕댕이’로, ‘명작’을 ‘띵작’으로 쓰는 것 정도일 텐데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 파괴 문제에서도 외래어를 많이 쓴다거나 지나친 줄임말을 쓰는 것 정도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커피 나오셨습니다’처럼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언어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모든 게 상품으로 환원되는 상품경제 시대에서 소비자는 왕이라는 인식, 지나친 소비자 중심주의가 ‘존대어 과잉’이란 언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맞나

다른 사례를 꼽는다면.
“같은 이유에서 ‘이리 오세요’ ‘돌아누우세요’란 말 대신 ‘이리 오실게요’ ‘돌아 누우실게요’가 통용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에 써야 할 어미 ‘∼게요’를 상대방에게 쓰는 셈이라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표현도 맞는 표현으로 용인될지 모르겠다. 말을 바르게 만들려면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언어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모습과 환경을 돌아보는 게 먼저다.”
언어 파괴가 심각한 상황이다.
“현학적 표현으로 자기 지식을 과시하는 지식인,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 등 지도층의 책임이 크다. 특히 정치인들의 억지 쓰기와 목소리 높이기는 말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듣기로 이뤄지는 언어생활의 기본을 흔든다. 국회에서 질문을 던져 놓고 답변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막 소리치는 광경이 익숙하다. 경청이 안 되면 언어생활이 안 되고, 그것이 바로 언어 파괴다.”

그와 인터뷰를 마친 뒤 국립국어원에 반론을 받기 위한 문의를 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자궁의 뜻풀이가 ‘여성의 정관의 일부가 발달하여 된 것으로 태아가 착상하여 자라는 기관’으로 명시돼 있는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4일 국립국어원 어문연구과 사전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1990년대 기존 사전을 참고해 표준국어대사전을 집필하면서 ‘수란관’을 ‘수정관’으로 잘못 인용했고, 이후 ‘수정관’을 일괄적으로 같은 뜻인 ‘정관’으로 바꾸면서 함께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여성은 정관이 없다”며 뜻풀이의 오류를 지적하는 의견이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만 2017년과 올해 4월 등 두 차례 올라왔고, 박씨가 2019년 펴낸 『국어사전 혼내는 책』에서도 언급됐다.

하지만 여전히 오류 수정이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국립국어원 이대성 사전팀장은 “외부 의견이 올라오면 비속어 등을 걸러내는 1차 검토를 마치고 내용 검증의 2차 검토를 한다. ‘자궁’에 대한 의견은 1차 검토를 끝낸 뒤 2차 검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인력이 부족해 밀려있는 사안이 많다”고 대답했다.

국어사전 담당 학예직 3명 불과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사전 업무를 하는 학예직 공무원은 3명이고, 계약직 직원까지 포함하면 총 13명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수정 절차는 단순 오류는 국립국어원 사전팀에서 수정하고, 논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분기마다 열리는 정보보완심의위원회를 거쳐 수정 여부를 결정한다. 한 해 수정 건수는 총 500~600건 정도다.

국립국어원은 본지가 문의한 지 2시간여 만인 4일 오후 1시39분 ‘자궁’의 뜻풀이를 ‘여성 생식 기관의 하나. 골반 안쪽에 있으며, 수정란이 착상하여 분만 때까지 태아가 자라는 기관’으로 수정했다.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이 처음 발간된 이래 24년 만이다.

◆박일환=1992년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 우수상 수상.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시인 등단했다. 1987년부터 30년 동안 중·고교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시집 『푸른 삼각뿔』 『학교는 입이 크다』 등과 『국어 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 『미주알고주알 우리말 속담』 『나는 바보 선생입니다』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