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들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김영식 여사 측 변호사)
“(상속 협의서 작성 후 실무진이) 폐기했습니다.” (증인 하범종 LG 경영지원부문장)
LG그룹 일가 상속 관련 분쟁은 고(故) 구본무 전 회장의 ‘유언 메모’ 존부를 다투는 것으로 시작됐다. 배우자 김영식 여사와 두 딸(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 씨)이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상속 재산을 다시 나누자’며 낸 소송이다.
5일 서울서부지법 민사11부(부장 박태일)는 상속회복청구소송 첫 변론기일에 구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하범종 LG경영지원부문장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는 20년 전 재무관리팀장 시절부터 구 전 회장에게 매일 아침 첫 보고를 올리고, 가족 개인 재산도 관리해 왔다.
LG일가 상속분쟁에 법정 선 고 구본무 최측근
하 부문장은 자신이 2017년 4월 구 전 회장의 ‘유언’을 직접 들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구 전 회장이 뇌종양 판정을 받아 병실에 있었는데 하루 이틀 만에 저를 찾아 말씀하셨다”며 “(구 전 회장이 말하길) ‘회장은 구광모가 해야 하고, (현재) 지분이 부족하니 앞으로 구 회장이 많은 지분을 가지게 하라’며 경영 재산 전체를 (구광모 회장에게) 넘기는 걸로 말씀 주셨다”고 했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구광모 회장 등이 있었는데 (구 전 회장이) ‘다 나가라’고 해 저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후 하 부문장은 사무실로 가 들은 말을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정리했고, 출력한 문서에 구 전 회장의 자필 서명을 받았다고 했다. “배우자보다도 신임이 두터웠냐”는 세 모녀 측 변호인의 질문에 그는 “신뢰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이날 증언 내내 해당 문서를 ‘유언장’이 아닌 ‘승계 문서’라고 말했다.
세 모녀 측 “본 적 없다”
하 부문장에 따르면 이 문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넷이다. 하 부문장은 “문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세 모녀 측 임성근 변호사의 질문에 “세 모녀와 구 회장”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임 변호사는 “원고들은 (해당 문서를) 본 적이 없다”며 “하 부문장이 (문서를) 보여줬다고 하는데, 본 적 없다고 한다면 증거를 대야 하지 않겠냐”고 의구심을 표했다.
문제의 ‘메모’ 내지 ‘승계 문서’는 현재 없다고 한다. 임 변호사가 “문서를 어디에 보관했냐”고 묻자 하 부문장은 “저희 팀 서류 보관하는 데에 보관했는데 (현재는) 폐기됐다”고 했다. 상속은 상속인들 간 별도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상속이 완료됐기에 해당 메모를 실무진이 폐기했다는 설명이다. 하 부문장은 “(LG그룹은 상속을 할 때) 유언장을 쓰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며 “(어차피) 법률적 효력이 있는 문서도, 유언장도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는 “그룹 총수의 상속 유지(遺旨)를 담은 문서고, 서명까지 했는데 실무진에서 그냥 폐기하느냐”며 “(진술의) 신빙성 여부는 재판부가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구 회장은 세 모녀가 상속재산분할 협의 방안에 동의해 놓고 이제 와서 이를 번복하려 한단 입장이다. 이날 재판에 구 회장과 김 여사 등 당사자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변호사들이 대신 뜻을 전했다. 구 회장 측 법률대리인 이재근 변호사는 “원고들이 지난해부터 뜬끔없이 유언장 있지 않나며 항의했고, 막무가내로 반복하는 것에 의아하지 않았느냐”며 하 부문장의 공감을 구했다. 이 변호사는 김 여사의 서명이 담긴, ‘가족을 대표해 경영 재산의 상속에 동의한다’는 취지의 동의서를 이날 법정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난 구 전 회장은 ㈜LG 주식 등 2조원 규모의 유산을 남겼는데, 회장직을 이어받은 구광모 회장이 ㈜LG 주식 중 8.76%를, 나머지를 두 딸이 나눠서 상속받았다. 김 여사와 두 딸은 구 전 회장의 개인 재산인 금융투자상품·부동산·미술품 등까지 총 약 5000억원 규모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