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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8명에 쫓겨난 '넘버3'…"민주주의 위기" 충격의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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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이 지난 3일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자신에 대한 해임결의안이 가결처리된 뒤 취재진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AP=연합뉴스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이 지난 3일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자신에 대한 해임결의안이 가결처리된 뒤 취재진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AP=연합뉴스

234년 미국 의정 사상 처음 벌어진 하원의장 해임 사태 이후 미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우려와 자성론이 분출하고 있다. 공화당 내 극단 진영에 선 하원의원 8명이 주동이 돼 권력 서열 3위의 자당 소속 하원의장을 축출하고 의회 정치의 ‘올스톱’ 부른 건 미국이 자랑해온 의회 민주주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경고음이라는 진단이다.

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정부학 교수는 4일(현지시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이 바로 그 모습”이라며 “뭔가 잘못됐다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알렉스 키사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역사·사회정책 교수도 “미국 민주주의는 이미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허약한 상태”라며 “하원에서 드러난 ‘무질서의 위기’가 증세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학계와 정가는 이번 하원의장 해임 과정에서 정당 핵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소수 강경파가 전체를 쥐고 흔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 해임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같은 공화당 강경파 8명은 전체 하원 의석수(재적 435명)의 1.8%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카시 하원의장에 대한 신뢰를 잃은 민주당이 가세해 그를 몰아내고 하원 의정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됐다. 로라 블레싱 조지타운대 정부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는 극소수의 정치인들이 거대한 의회·재정 기능의 장애를 야기한 사태를 목격하고 있다”고 WP에 말했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촉발한 극단의 정치 심화 원인을 놓고는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WP는 “정치학자 등은 소셜미디어와 케이블뉴스가 정치인들에게 유권자 대신 카메라를 위해 일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고 보도했다.

“소수 극단 진영이 정당 체질 약화시켜”

소수의 극단 진영 목소리가 기성 정당의 체질 약화를 불렀다는 진단도 이어졌다. 이안 샤피로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정당이 매우 강하다는 오해”라며 “하지만 최근 정당 자체는 소수의 주변부 사람들에 통제되면서 체질적으로 약해졌다”고 말했다.

공화·민주 양대 정당 가운데 특정 정당이 확실하게 우세를 점하는 지역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붉은색(공화당 상징색)이나 푸른색(민주당) 중 어느 한 쪽이 도배하다시피 하는 선거구는 당내 경선에서 사실상 해당 의원이 결정되며 유권자 전체가 참여하는 본선거는 요식행위로 전락한다. 샤피로 교수는 “정당 외곽의 일부 활동가들이 당내 예비선거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들이 지역구 의원을 사실상 결정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정 지지층 표심에만 올인하는 환경이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WP는 매카시 전 하원의장에 반기를 든 공화당 의원 8명의 지역구를 분석한 결과 미국의 평균적인 인구통계학적 분포와는 다른 경향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지역구 내 백인 비율은 71%로 미국 전체 인구 중 백인 비율(59%)에 비해 꽤 높다. 반면 이들 지역구의 흑인 비율(8%)은 미국 전체 인구 중 흑인 비율(14%)에 비해 낮다.

이들이 속한 지역구가 특정 정당에 경도되는 성향을 보여주는 ‘쿡 당파성 지수’(공화당 지지 비율)는 평균보다 12점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 붕괴의 전 단계는 정치적 교착 상태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기능 장애 상태”라며 “역사는 정부의 기능 장애 시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권위주의가 부상하는 서곡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공화당 원로 “게이츠, 당에서 쫓아내야”

극심한 내홍에 휩싸인 공화당에선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맷 게이츠 의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1995~1999년 하원의장을 맡았던 뉴트 깅그리치 전 공화당 의원은 이날 WP 기고문에서 “게이츠는 반(反)공화당원”이라고 비판하며 “게이츠가 낸 하원의장 해임안은 신속히 부결됐어야 했지만 실패했다. 게이츠는 공화당 하원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원로 중 하나인 깅그리치 전 하원의원은 “게이츠는 공화당 하원의원단의 정치력을 파괴하고 있다”며 “하원 공화당원들은 한 명(게이츠)의 자아를 즐겁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하원의장 해임결의안을 낸 맷 게이츠 공화당 하원의원(가운데)이 지난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의장 해임안 가결처리 후 의사당을 떠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하원의장 해임결의안을 낸 맷 게이츠 공화당 하원의원(가운데)이 지난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의장 해임안 가결처리 후 의사당을 떠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공화당 마이클 롤러 하원의원은 이날 취재진을 만나 “게이츠 의원을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의 돈 베이커 하원의원 역시 “게이츠는 공화당에 있어서는 안 된다. 공화당 하원의원단에서 빠지면 좋겠다”고 했고, 마이크 가르시아 하원의원은 게이츠를 향해 “그는 너무나 무모한 공화당원”이라고 비판했다. 플로리다주에 지역구를 둔 4선의 맷 게이츠 하원의원은 프리덤 코커스로 대표되는 당내 강경 우파 진영 내 정치인이며 친트럼프 성향으로도 유명하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하원의장 해임 과정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사로 알려진 스티브 배넌이 개입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NYT는 이날 보도에서 극우 성향의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당내 영향력을 행사해온 배넌이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공화당의 맷 게이츠·낸시 메이스 하원의원에게 해임 관련 전략을 짜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두 의원은 의장 해임 바로 다음날 배넌의 팟캐스트 녹음 현장에 참석했고, 배넌은 이들을 ‘영웅’으로 칭하며 정치자금 기부를 유도했다.

차기 의장 경쟁 본격화…조던, 스컬리스 출사표

공석이 된 하원의장 자리를 놓고는 공화당 내부 경쟁이 본격 점화됐다. 하원 법사위원장으로 있는 짐 조던 의원이 가장 먼저 출사표를 냈다. 조던 의원은 자당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우리는 미국 역사상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미국 국민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화당이 함께할 때”라며 하원의장 선거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는 2015년 프리덤 코커스 창립 멤버이자 친트럼프 인사 중 중 하나로 지난 1월 하원의장 선거 때 매카시에 반대하는 일부 강경파의 지지를 받은 바 있다.

공화당 권력 서열 2위인 스티브 스컬리스 당 원내대표도 같은 당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우리는 미국을 다시 올바른 길에 되돌려 놓기 위해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갈 필요가 있다”며 하원의장 도전 의사를 밝혔다. 다만 최근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고 있어 건강 우려가 있다는 게 변수다. 이밖에 ‘공화당연구위원회’ 의장 케빈 헌 의원, 하원 규칙위원장 톰 콜 의원 등도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잠재적 경쟁자 중 하나였던 톰 에머 원내총무는 원내대표 자리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인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프리덤 코커스 반발시 의장 선출 공전 가능성

일각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거론하고 있다. 재산 부풀리기 의혹과 관련된 민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이날 사흘째 뉴욕 맨해튼지법에 출석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하원의장을) 맡아달라고 연락해 오고 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라와 공화당,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말뿐”이라고 했다.

하원의장직에 출마 여부에 시인도 부인도 안했지만 주변에선 대통령 재선 캠페인에 집중할 거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후임 하원의장 선거는 이르면 오는 11일 하원 본회의에서 진행될 전망이며, 공화당은 하루 앞선 10일 의원총회에서 후보들 정견 발표를 들을 계획이다. 하지만 공화당 내 20~40명으로 추산되는 프리덤 코커스를 위시한 극우 강경파들이 이번에도 당내 다수 합의에 비토(거부권 행사)를 할 경우 공전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공화당 내에선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제도를 차제에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1월 매카시 전 하원의장이 15차례 투표 끝에 의장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당내 강경파 회유책으로 의장 해임결의안 제출 기준을 ‘1인 발의’로 낮춘 바 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다음 의장이 누가 되든 의장 해임결의안을 없애주기 바란다. 그것은 하원의장이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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