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7억→160만원 떨어져도 안 산다…화곡동 이 빌라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강서구 화곡동 소재 빌라 중 경매 최저매각가격이 161만4000원으로 최저 책정된 빌라 전경. 이 빌라의 감정가는 1억7500만원으로 2020년 9월 경매사건이 접수돼 이듬해인 2021년 5월13일 1억7500만원에 경매를 시작했지만, 22차례 유찰되면서 최저가가 감정가의 1%에도 못 미치게 됐다. 손성배 기자

서울 강서구 화곡동 소재 빌라 중 경매 최저매각가격이 161만4000원으로 최저 책정된 빌라 전경. 이 빌라의 감정가는 1억7500만원으로 2020년 9월 경매사건이 접수돼 이듬해인 2021년 5월13일 1억7500만원에 경매를 시작했지만, 22차례 유찰되면서 최저가가 감정가의 1%에도 못 미치게 됐다. 손성배 기자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경매 시작가 161만원짜리 빌라 매물이 등장했다. 면적 46.44㎡(14.05평)로 2인 가구도 거주 가능한 크기에다 처음 경매 등장 당시 1억 7500만원이었던 가격이 22차례 유찰을 거쳐 감정가의 1% 미만까지 떨어졌지만,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까닭일까.

경매가 1억7500만원→161만원에도 낙찰자 ‘없음’

4일 법원 경매사이트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에 화곡동 경매 물건으로 등록된 빌라 2955채 중 4층짜리 빌라 건물 가장 높은 층에 있는 46.44㎡ 크기의 한 호실 경매 시작가는 161만4000원으로 책정됐다. 감정가(1억7500만원)의 0.92% 수준으로, 지난 2021년 5월 1차 경매(최저가 1억7500만원)부터 지난달 20일 22차(201만8000원)까지 한 사람도 입찰하지 않으며 가격이 200만원 이하까지 떨어졌다. 빌라가 밀집한 화곡동에서도 경매 시작가가 200만원 이하로 떨어진 빌라는 해당 매물이 유일하다. 그러나 지역 부동산 업계는 오는 25일로 예정된 23차 경매에서도 입찰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배경에는 화곡동을 휩쓴 전세 사기 사건이 있다. 해당 매물이 전세 사기 물건이라, 161만 4000원에 낙찰 받더라도 임차인이 설정한 임차권등기명령에 따라 전 주인이 돌려주지 않은 보증금 1억 7400만원을 대신 부담해야 한다. 실제 빌라 매수 비용은 1억 7400만원 이상인 것이다. 여기에 입찰보증금과 법원에 낼 경매 진행 비용 300~500만원을 더하면 결국 감정가보다 더 많은 돈을 부담해야 한다.

화곡동에서 30년 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한 홍용철 한성부동산 대표공인중개사는 “깡통 전세(전세 보증금이 주택 실제 가치를 초과한 상태)가 경매로 넘어간 경우 유찰이 반복된다. 경매가는 몇백만원까지 떨어지더라도, 실제로는 매수인이 임차인 보증금을 다 내야 인수할 수 있기 때문에 경매 실익은 없을 수 있다”며 “대형 전세 사기 사건이 터진 화곡동에 이런 매물들이 여러 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화곡동에는 4일 기준 경매 시작 가격이 1000만원 미만인 빌라가 5채 있었다. 이 중 한 곳은 18회 유찰 끝에 394만4000원이 됐고, 14회 유찰된 한 곳은 615만8000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 나머지 3채는 각각 653만원(16회 유찰), 853만원(15회 유찰), 973만원(13회 유찰)에 경매에 나왔다. 모두 전세 사기 물건이다. 또한 일대가 국회대로 공공주택복합사업, 서울시 모아주택·모아타운 예정지 등으로 지정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개발사업 부지로 지정된 이후에는 부지 내 부동산을 매입하더라도 분양권은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8년 사용승인을 받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6층짜리 빌라의 한 호실 앞에 관리비 미납 고지서가 붙어있다. 지난 2월분 관리비 고지서에 미납 금액이 이 호실만 100만7180원으로 표기돼있다. 해당 빌라의 17개 호실 중 12개 호실이 2021년부터 공실이다. 손성배 기자

2018년 사용승인을 받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6층짜리 빌라의 한 호실 앞에 관리비 미납 고지서가 붙어있다. 지난 2월분 관리비 고지서에 미납 금액이 이 호실만 100만7180원으로 표기돼있다. 해당 빌라의 17개 호실 중 12개 호실이 2021년부터 공실이다. 손성배 기자

“엘리베이터 못 타고 화장실 물도 못 내릴 지경”

초저가 경매 물건들조차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화곡동 내 빌라 공실은 계속 늘고 있고, 이에 비례해 거주민들과 임대인들의 고통 역시 커지고 있다. 공용 전기와 엘리베이터, 소방시설 운영 비용 등을 임차인들이 나눠서 부담해야 하는데 공실이 늘며 매달 내는 관리비 인상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사용 승인을 받은 6층짜리 M 빌라는 전체 17개 호실 중 5개 호실에만 임차인이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 12개 호실은 비어있다. 관리업체는 앞서 각 호실에 정액 관리비 5만원을 부과해왔지만, 공실이 늘면서부터는 최소 비용인 60만원도 걷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손해를 감내하면서도 계약을 유지해왔던 업체는 결국 공실로 인한 미납 관리비가 1000만원에 육박하자 지난 8월 31일자로 관리 계약을 종료를 위한 안내 문자를 임차인들에게 발송했다. M 빌라 임차인 임모(26)씨는 “소방과 엘리베이터, 공용 전기 등은 전문업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관리업체가 빠지면 당장 엘리베이터를 못 쓴다고 한다. 정화조도 관리하지 못해 화장실까지 못 쓰게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임대인들 역시 전세 사기 사건으로 인한 2차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공실로 인해 커진 관리비 부담을 임차인에게 모두 다 떠넘길 수 없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려는 임차인들이 계속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M 빌라 임대인 이모(40)씨는 “현재 임차인이 있는 임대인들끼리 공용 관리비를 월 7만원씩 부담해 관리업체가 계약을 종료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며 “보증금을 떼먹은 나쁜 임대인들 때문에 남은 임차인들과 선량한 임대인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경매로 공실이 해소돼야 하는데 잘 안되고 있어서 앞으로 더 힘들어 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2018년 사용승인을 받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6층짜리 빌라. 17개 호실 중 12개 호실이 2021년부터 공실 상태다. 남겨진 5개 호실 임차인과 임대인들은 공실 탓에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 부담이 커진 데다 관리업체가 계약 종료까지 한 차례 통보해 엘리베이터, 공용 전기, 소방 설비, 정화조 수도 등을 사용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2018년 사용승인을 받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6층짜리 빌라. 17개 호실 중 12개 호실이 2021년부터 공실 상태다. 남겨진 5개 호실 임차인과 임대인들은 공실 탓에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 부담이 커진 데다 관리업체가 계약 종료까지 한 차례 통보해 엘리베이터, 공용 전기, 소방 설비, 정화조 수도 등을 사용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HUG 경매 채권 회수 포기 선정은 ‘영업 비밀’

다른 전세 사기 사건 발생 지역 역시 공실 증가로 인한 주민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지역 부동산 업계와 주민들 사이에선 “낙찰자가 전 주인이 떼먹은 보증금을 대신 물어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도록 특별법이라도 시행해야 한다”(홍용철 공인중개사)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잇따른 경매 유찰로 손해가 쌓이고 있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도 일부 매물에 대해서는 경매 낙찰자에게 임차인 보증금을 전액 청구하는 대신, ‘대항력 포기 확약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일단 낙찰이 돼야 HUG가 대신 돌려준 보증금의 일부분이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기준 HUG가 이 확약서를 법원에 제출한 경매신청 물건은 총 144채이며, 중앙일보가 전수 확인한 결과 이 중 45채가 약 2개월 만에 낙찰되며 새 주인을 찾았다.

다만 HUG 역시 경매 낙찰자의 보증금 변제 책임을 면제하는 ‘대항력 포기 경매’를 마냥 확대할 순 없는 입장이다. 전세 사기 피의자에게 채권을 회수할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모든 손실을 다 떠안을 경우 손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HUG가 올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 대신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대위변제) 금액은 약 3조7861억원에 달한다. HUG 관계자는 “대항력 포기 대상 물건을 정하는 구체적인 요건은 영업 비밀이다. 각 영업점에서 유찰 횟수와 채권액 회수 가능성 등을 고려해 일부에 대해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