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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무권유죄 유권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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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진중권 광운대 교수

유권무죄, 무권유죄. 실제로 그가 ‘공당의 대표’라는 사실을 영장 기각 사유의 하나로 기재되었다. 해석학과 언어철학을 전공했지만, 영장 판사가 밝힌 기각의 사유는 이차대전 중의 에니그마 머신만큼 난해하기 짝이 없다. 하나씩 살펴보자.

증거는 충분하나 부족하다?=“위증교사 및 백현동 개발 사업의 경우, 현재까지 확보된 인적·물적 자료에 비추어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굳이 인멸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죄를 입증할 인적·물적 증거가 이미 확보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정바울-김인섭이 자백을 했고, 사업이 그들의 요구대로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이재명 시장 결재 문건들이 존재한다. 관계 공무원들의 진술도 확보됐다. 김인섭이 챙긴 70억은 성남시를 상대로 허가방 일을 해준 대가. 인허권자는 이재명. ‘소명’에 뭐가 더 필요한가?

증거 확보돼 증거인멸 우려 없다?
자료는 있지만 직접증거는 없다?
난해한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문
공당 대표 신분 의식한 것 아닌가

‘인적·물적 증거가 확보되었다’는 판단과 ‘직접증거가 부족하니 증거를 더 찾아오라’는 요구는 서로 충돌한다. 이 모순을 완화해 주는 게 증거라는 말 앞에 붙은 ‘직접’이라는 말. 즉, 간접증거는 많아도 직접증거는 없다는 얘기다. 대체 ‘직접증거’가 뭘까? 이재명 시장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 같은 것? 세상에, 자신들이 하는 불법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멍청한 범인도 있던가. 육성 녹음 이외의 다른 증거들은 다 간접증거, 즉 한갓 정황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위증교사는 증거인멸이 아니다?=‘위증교사’ 부분은 궤변 수준이다. 영장판사 자신도 혐의는 소명됐다고 밝혔다. 이재명 도지사가 위증교사의 현장이 녹음됐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위증 교사가 재판부를 속이기 위해 했다는 데에 있다. 상식적으로 위증을 교사한 자는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위증교사의 증거가 확보되어 있어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단다. 그럼 ‘피의자에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려면 그에게 위증교사를 한 증거가 없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대북 송금 건도 마찬가지다. “피의자의 주변 인물에 의한 부적절한 개입을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기는 하나 피의자가 직접 개입하였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는 부족하다.” 이화영에 대한 압박은 이재명 ‘측’이 한 짓이지 ‘이재명’이 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장심사는 ‘죄가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느냐’를 판단하는 절차다. 이화영의 진술번복에 “주변 인물에 의한 부적절한 개입이 의심”된다면, 설사 ‘단정’까지는 못 해도 적어도 증거 인멸의 ‘우려’는 있는 거 아닌가?

진술의 임의성은 있으면서 없다?=“이화영의 기존 수사기관 진술에 임의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고, 진술의 변화는 진술 신빙성 영역의 판단영역인 점.” 이 문장은 이상하다. 맥락상 임의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고’(and)가 아니라 ‘없다고 보기 어려우나’(but)라고 해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이화영이 검찰에서 한 진술에 임의성이 있다는 것은 영장 발부의 사유가 된다. 그런데 ‘but’ 대신 ‘and’를 사용하는 바람에 ‘자백에 임의성이 있다’는 사실이 거꾸로 기각의 사유로 사용된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영장판사 자신도 이화영이 검찰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했다. 심지어 진술이 번복되는 과정에 “피의자 주변 인물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본인도 “의심”한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증거 인멸이 우려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공당의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의 대상임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 말은 상식을 물구나무 세운다. 판사 본인도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는 “피의자 주변 인물의 개입”도 그가 “공당의 대표”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저주인가 축복인가=위증교사는 소명됐다. 백현동 건은 인적·물적 증거가 확보됐다. 대북송금 건은 진술의 임의성이 인정됐다. 사실 유죄판결과 다름없는데, 그럼에도 영장을 기각한 것은 ‘공당의 대표를 굳이 구속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소신에 상황을 억지로 꿰맞춘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환호한다. 근데 이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들은 대표 한 사람에 당의 운명을 걸고 있다. 근데 이 대표의 수많은 혐의 중 단 하나에라도 ‘집행유예’ 이상이 선고되면, 그는 피선거권을 잃는다. 이미 소명된 위증교사는 형량이 징역 3월~3년이다. 이재명 대표의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겠다는 개인적 목표를 이루었다. 하지만 당은 조만간 내려질 선거법 재판의 선고만으로도 치명상을 입는다. 민주당이 사당이 되다 보니, 대표의 위기와 당의 위기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이재명 대표에게 목을 매는 것은 그 외에 확실한 대선 카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카드, 다음 대선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