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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AI 반도체 쑥쑥 성장하는데…토종 업체들 “뭉치면 기회의 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챗GPT 등 인공지능(AI) 기술이 일상에 빠르게 퍼지면서 반도체 업계의 합종연횡도 가속화하고 있다. 최근 캐나다의 AI 반도체 업체 텐스토렌트가 삼성전자에 생산을 맡기고, 삼성전자는 미국 AI 반도체 설계기업 암바렐라와 협력하는 게 좋은 예다.

격차 커지는 메모리 vs 비메모리 

AI 시대에 가장 뜨거운 분야는 정보를 처리해 특정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반도체다. 4일 산업연구원 등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의 점유율은 76.1%로 D램 등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23.9%)의 3배를 넘어섰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AI 기술의 가속화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약자로 인식된 한국의 위상을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로 꼽힌다. 창작 활동은 물론 생산시설·자율주행차·가전기기 등 기능별로 세분화한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를 찾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시장은 각 업체가 잘하는 것을 만들어 ‘협력’할수록 구현할 수 있는 기술·기기가 많아지고,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우수한 중소기업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환경이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는 크게 ‘반도체 설계자산(IP)→반도체 설계(팹리스)→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패키징(포장 및 테스트)’으로 흐른다. 현재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지만, IP와 팹리스 분야엔 여전히 기회가 많다는 평가다.

해외로 빠지는 인재·라이선스를 국내로  

지난 2012년 삼성전자 출신의 이성현 대표가 설립한 오픈엣지테크놀로지(오픈엣지)는 반도체 설계에 필요한 IP(intellectual property) 기업이다. 반도체 IP란 반도체의 특정 기능을 회로로 구현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다. 주 수익원은 일반 지식재산권과 같이 라이선스와 사용료, 로열티 등이다.

지난달 이성현 오픈엣지테크놀로지 대표가 서울 강남 본사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소아 기자

지난달 이성현 오픈엣지테크놀로지 대표가 서울 강남 본사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소아 기자

시장이 원하는 반도체가 점점 복잡·다양해지면서 반도체 설계기업이 모든 것을 자체 설계하는 게 불가능해졌고, 기능별로 검증된 IP를 구매해 활용하게 됐다. 좋은 식재료를 많이 확보할수록 좋은 요리법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성현 대표는 “삼성 스마트폰 두뇌인 엑시노스(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하나에만 100개의 기능 블록이 들어간다. 이걸 한 회사가 다 만들려면 개발 비용만 1000억원 이상 들고, 실패하면 회사가 휘청일 수 있다”며 “믿고 쓸 수 있는 IP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IP 기업은 세계에 20곳도 안 된다. 검증된 기술의 IP를, 급변하는 반도체 트렌드에 맞게 2~3년 전에 선행 개발하는 일은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소비자가 어떤 기술을 원하는지 트렌드를 읽고, 반도체의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체 과정을 이해하는 경험과 노련함이 필요하다”며 “강력한 반도체 업력을 가진 한국 인력과 기업이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오픈엣지의 전문 분야는 사람의 섬세한 신경망을 모사한 신경망 처리장치(NPU)다. 특히 막대한 정보를 병목 현상 없이 NPU에 전달하는 메모리 시스템을 통합 개발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오픈엣지는 국내 1위 팹리스 기업인 LX세미콘, 현대차 납품사인 텔레칩스, 토요타 자회사인 아이싱 등을 비롯해 굵직한 고객사를 두고 있다.

이 대표가 가장 강조하는 건 시스템반도체 업계 내 협업이다. 지난 8월 ‘오픈엣지스퀘어’라는 플랫폼 자회사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플랫폼은 누구든 참여해 다양한 IP를 선보이고 평가해보며 사고팔 수 있는 장터 같은 개념이다.

이 대표는 “해외 IP를 사다 쓰는 게 단순히 외화유출 문제가 아니다”라며 “IP 개발 인력은 매우 고급인력이라 외국기업에서 고액을 주고 데려가는데, 인력이 해외로 빠지면 한국에선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스템반도체는 전략적으로 꾸준히 투자하는 게 중요하다”며 “나라마다 첨단 기술 전쟁을 하는데 한국의 투자는 소극적인 편”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정부가 지난 6월 발표한 반도체 펀드 3000억원은 아직도 출범도 못 하고 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최종 목표 금액이 3000억원이고 2개년도에 나눠서 조성하는데, 이르면 연내에 1호 투자에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 한국 반도체 쓰는 이유 

김녹원 딥엑스 대표와 윤일용 포스코 DX 상무가 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판교 딥엑스 본사에서 NPU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두 회사는 지난 4월 업무협약(MOU)을 맺고, 토종 AI반도체로 토종 스마트팩토리 구현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김녹원 딥엑스 대표와 윤일용 포스코 DX 상무가 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판교 딥엑스 본사에서 NPU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두 회사는 지난 4월 업무협약(MOU)을 맺고, 토종 AI반도체로 토종 스마트팩토리 구현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한국 시스템반도체 업체 중 상당수는 우수한 기술 인력들이 창업한 스타트업들이다. 팹리스 업체인 딥엑스도 마찬가지다. 미국 애플에서 아이폰 AP를 개발하던 김녹원 대표는 ‘AI 반도체를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자’는 제안서를 냈다가 거절당한 뒤 2018년 딥엑스를 창업했다.

최근 딥엑스는 포스코그룹의 정보기술(IT) 계열사인 포스코DX와 의미 있는 협업을 시작했다. 포스코DX의 스마트팩토리 시스템인 ‘포스마스터’에 들어갈 반도체를 설계해 완전 자동화에 가까운 AI 공장을 만드는 일이다.

딥엑스는 현재 AI용 NPU 4개 제품군을 개발했는데, 포스코DX와 실증 중인 제품은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의 5나노미터(㎚·10억 분의 1m) 파운드리 공정으로 제작됐다.

중요한 건 포항·광양제철소 폐쇄회로(CCTV)와 로봇·센서 등에서 천문학적으로 생산되는 데이터들을 실시간으로 인식·해석하는 동시에 제어하는 기능이다. 윤일용 포스코DX AI기술그룹 상무는 “외산 제품과 비교했을 때 AI 알고리즘의 최신성, 연산의 정확도 등 성능이 빠지지 않았다”며 “특히 AI 반도체 개발단계에선 빠른 기술지원이 중요한데, 해외보다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장점이 크다”고 말했다.

김녹원 딥엑스 대표가 자체개발한 NPU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김녹원 딥엑스 대표가 자체개발한 NPU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윤일용 포스코DX 상무가 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판교 포스코DX 본사에서 딥엑스의 인공지능(AI) 반도체를 기반으로 구현한 물류 이동 시스템 모형을 소개하고 있다. 판교=고석현 기자

윤일용 포스코DX 상무가 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판교 포스코DX 본사에서 딥엑스의 인공지능(AI) 반도체를 기반으로 구현한 물류 이동 시스템 모형을 소개하고 있다. 판교=고석현 기자

딥엑스의 칩은 내년 하반기 양산돼 2025년 고객사 제품으로 출시된다. 김 대표는 “우리 기술이 스마트팩토리 반도체 솔루션 분야에서 ‘글로벌 표준’이 되면 한국 기업이 AI 시장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IP나 팹리스 스타트업들에겐 대기업과 협업해 우수한 기술을 입증할 기회(양산)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당장의 수익보다 대기업과 중소 스타트업과의 접점을 늘리는 채널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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