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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정치’·‘대결 정치’ 손잡았다…하원의장 축출에 워싱턴 대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하원 의사당 내 복도를 걸으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하원 의사당 내 복도를 걸으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다음은 뭔가?”(What’s next?)
3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역사상 초유의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가결처리 직후 혼란에 빠진 공화당의 회의실에서 의원들 사이에 터져 나온 개탄의 목소리다.

미 하원은 이날 오후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216표 대 반대 210표로 가결처리했다. 매카시와 같은 공화당(218명) 의원 210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내 극우 강경파 의원 8명이 이탈했다. 여기에 표결에 참가한 민주당 의원 208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지난 1월 당내 강경파 반대 속에 15번의 투표 끝에 어렵사리 하원의장에 선출된 매카시는 9개월 만에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234년 된 미 의회 역사에서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 해임안이 제출된 건 1910년(조지프 캐넌), 2015년(존 베이너)에도 있었지만, 표결에 부쳐져 실제 가결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매카시 ‘생환’ 자신했지만…기류 급변

초유의 사태는 의장 해임안을 낸 맷 게이츠 하원의원 등 공화당 내 ‘프리덤 코커스’로 대표되는 극단주의 강경파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매카시 의장이 연방정부 '셧다운'(업무 중단)을 막기 위한 임시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재정지출 대폭 삭감 및 이민정책 예산 증액 등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민주당 정부에 협조했다며 해임을 추진했다.

이날 투표 전까지만 해도 해임안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이 많았다. 매카시 의장 본인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며 ‘생환’을 자신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하원 본회의장에서 알파벳 순으로 호명된 의원이 해임안에 대한 찬반 의사를 밝히는 표결 절차가 진행되면서 기류는 급변했다. 해임안을 낸 게이츠를 비롯해 앤디 빅스, 밥 굿 등 공화당 강경파 의원 8명이 찬성표를 던질 거라는 건 예상이 됐다.

그런데 민주당 의원들이 전원 찬성표를 던지면서 뜻밖의 상황이 전개됐다. 당초 민주당 의원 중 일부는 표결에 불참하거나 참석하더라도 기권표를 던져 ‘매카시 의장 구하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지원을 할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

민주당은 이날 오전 비공개 회의 때 당론으로 ‘해임안 찬성’을 정했다고 한다.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표결 전 “공화당 내전 종식의 책임은 공화당에 있다”고 말해 민주당 단일대오를 예고했다. 매카시 하원의장이 임시예산안 통과로 정부 셧다운을 막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를 하원 상임위에 지시하는 등 과정에서 민주당 측 신뢰를 잃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 부채한도 협상 당시 약속을 깨고 셧다운 위기 직전까지 상황을 몰고 간 것에 대한 책임도 민주당은 거론했다. 결과적으로 공화당 내 비타협적 강성 진영의 ‘극단의 정치’와 공화당에 대립각을 세운 민주당의 ‘대결의 정치’가 결합해 미 의정 사상 최초의 하원의장 해임 사태를 부른 셈이다.

공화당 일부 “어떡할 거냐”…미 정국 대혼란

공화당 내 일부 온건 성향 의원들은 의장 해임 확정 직후 강경파 의원들을 향해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고함을 질렀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카오스(혼돈)는 미국의 친구가 될 수 없다”며 매카시가 다시 하원의장으로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글을 통해 “왜 항상 공화당은 자기들끼리 싸우는가”라고 비판했다.

미증유의 하원의장 공석 사태가 벌어지면서 미 정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초 매카시의 재출마 가능성이 예상됐지만, 그는 이날 취재진에게 “의장직을 떠난다.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후임 하원의장 후보로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를 밀지만 공화당 다수, 민주당 소수의 하원 구조에서 실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공화당에서는 하원 2인자인 스티브 스컬리스 하원 원내대표가 당 의원들에게 차기 의장직과 관련해 연락을 시작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해임안 제출의 주역 게이츠 의원은 차기 의장에 스컬리스 지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밖에 공화당 하원 서열 3위인 톰 에머 원내총무, 트럼프 전 대통령 측근인 짐 조던 법사위원장, 엘리스 스테파닉 의원 등도 거론된다. 하원의장 자격을 현역 의원으로 제한하는 법 조항은 없다는 점을 들어 트럼프 전 대통령을 거론하는 쪽도 있으나 트럼프는 의장직에 관심 없다고 말한 적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차기 의장 선출 전까지 임시 의장은 매카시 의장 측근인 패트릭 맥헨리 금융위원장이 맡게 됐다. 매카시가 지난 1월 선출 때 유사시 의장직을 대신할 사람들을 써내는 비공개 명단에서 맥헨리 의원을 맨 위에 썼기 때문이라고 NBC 방송이 전했다. 매카시의 최측근 중 한 명인 맥헨리는 후임 의장이 공식 선출될 때까지 의사 진행 등 제한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의회 민주주의 실종…꼬리가 몸통 흔들어”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맷 게이츠 공화당 하원의원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맷 게이츠 공화당 하원의원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 하원은 차기 의장이 뽑힐 때까지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하다. 당장 내년도 예산안과 국방수권법안 등 주요 의사일정 처리가 당분간 마비될 가능성이 높다. 하원의장 해임안 표결 과정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간 신뢰가 깨져 향후 각종 법안이나 고위공직자 임명안의 여야 합의 처리 등 협치의 구현은 상당 기간 기대하기 어려울 거란 전망이 나온다.

후임 의장 선출도 장기간 공전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말 임시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빠진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처리도 다시 불투명해졌다. 이날 백악관은 카린 잔피에어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내고 “미국이 직면한 시급한 도전 과제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하원이 속히 의장을 선출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의회 민주주의의 실종’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 싱크탱크 루거센터의 폴 공 선임연구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20년 대선 직후 트럼프의 대선 패배에 불만을 품은 일부 강성 지지층의 1ㆍ6 의사당 난입 사태에 이어 하원의장 축출까지 현실화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추락이 깊어지고 있다”며 “어른들이 이끌던 공화당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소수의 극우 강경파로 대표되는 꼬리가 정당과 의회 정치라는 몸통 전체를 흔드는 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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