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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어렵게 키운 ‘아리랑TV’ 버릴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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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러시아의 침공으로 지난해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공급이 어려워지자 지구촌 곳곳에서 전력난과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의 체제 경쟁으로 비화했다. ‘글로벌 체제 경쟁’의 한복판에 치열한 정보전쟁을 수행하는 국제방송이 있다. 러시아 RT와 중국 CGTN이 한 축이다. 다른 한 편에 독일 DW, 미국 VOA, 영국 BBC, 프랑스 F24가 있다.

세계는 지금 ‘국제방송’ 경쟁 중
K팝 등 한국문화 알려온 채널
내년도 예산 50% 깎을 일인가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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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 연관된 국가가 아니더라도 체제 전쟁에서 때아닌 신앙고백을 강요받는 상황이다. 20세기 국제방송이 서방 세계의 문화적·정치적 체제 우월성을 알리는 홍보수단이었다면, 21세기 국제방송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호감도를 끌어올리는 역할과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창구다.

1996년 개국한 아리랑TV는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알려왔다. 2000년대 말부터 아리랑TV는 기존에 수행했던 국가 이미지 홍보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 문화와 관광 자원, 한국 기업을 해외에 알리는 K콘텐트 허브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전 세계 대중음악의 한 장르인 K팝 시장을 개척한 방탄소년단을 해외에 처음 소개한 플랫폼도 아리랑TV였다.

국제사회가 체제 경쟁을 강화하면서 영국 BBC, 독일 DW, 프랑스 F24, 미국 VOA는 자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 중심에서 뉴스를 통해 민주주의 체제 우월성을 알리는 프로그램 편성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러나 아리랑TV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국제적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선택을 했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국제경쟁력을 유지해야 하는 처지다. 약점을 강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보자산을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써야 한다.

북한 김정은이 지난 13일 러시아를 방문해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푸틴과 회담했다. 독자 위성이 없는 북한은 지금까지 통신보안을 이유로 조선중앙TV의 해외 송출을 태국의 한 통신회사에 의존해왔다. 만약 북한이 러시아의 기술 지원으로 독자 위성을 갖게 되면 남북은 위성을 통한 첩보 전쟁뿐 아니라 본격적인 국제방송 정보경쟁을 할 것이다.

아리랑TV가 송출하는 프로그램은 동북아는 물론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한국의 관점을 녹여 넣은 정치·경제·문화 관련 콘텐트를 제공한다. 특히 K콘텐트의 주요 소비층이자 문화적 장벽이 낮은 20~30세대를 겨냥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강대국을 따라 하거나 글로벌 시장에서 소액을 벌기 위한 상업적 경쟁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이런 노력에도 아리랑TV는 공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이라는 법적 취약성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 환경에서는 단순히 위성송출 위주에서 벗어나 온라인과 모바일 중심의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는 투자가 불가능하다. 재원 확보의 안정성이 떨어져서다.

어느 국가나 국제방송은 수익을 창출하는 기관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공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그런데도 매년 국회 예산심사과정에서 정부기관들 사이의 감독 권한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아리랑TV는 기본운영비 확보조차 어려움을 겪는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아리랑TV 기본인건비를 전년 대비 50% 삭감한 채 국회에 제출했다. 아리랑TV의 기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실상 국제방송 폐지 예산안과 다름없어 보인다. 기본예산마저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보니 우수 인력이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아리랑TV의 부장급 평균 연봉은 다른 공영방송 부장급 평균연봉의 절반 수준이다. 공영방송의 부실한 경영 구조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마른 수건마저 쥐어짜야 하는 아리랑TV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국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공공기관의 예산삭감이 불가피하겠지만, 유지해야 할 예산도 있는 법이다. 국제방송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키워온 좋은 자산을 더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가진 자산마저 탕진할 것인지 선택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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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