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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한국 반도체의 시작 강기동, 그는 코리안 프로메테우스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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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1974년 국내 첫 반도체 공장을 세운 강기동 박사를 지난달 만났다. 몇몇 숫자를 혼동하기는 했지만 아흔의 나이에도 수십 년 전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전민규 기자

지난 1974년 국내 첫 반도체 공장을 세운 강기동 박사를 지난달 만났다. 몇몇 숫자를 혼동하기는 했지만 아흔의 나이에도 수십 년 전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전민규 기자

국경일인 개천절과 한글날, 그리고 국군의 날 정도만 알지만 10월은 기념일만 12개다. 정부 공식 기념일 외에도 반도체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94)을 기념하는 반도체의 날(29일)이 있다. 그런데 "반도체의 날은 10월 29일이 아니라 국내 첫 반도체 공장인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의 설립 인가일인 1월 26일(1974)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삼성보다 10년 앞서 이 땅에 최초이자 당대 최첨단인 C-MOS 공정 반도체 공장을 세운 강기동(89) 박사다.

반도체 핵심기술 모스펫 개발한 세계적 학자 강대원
직속 후배 강기동은 모토로라 시절 노하우로 한국에 공장
미국 남은 강대원과 한국 택한 강기동의 엇갈린 운명
NEC 연구소 종신소장 vs. 한·미서 외면당한 비운의 인물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로 대중적 인지도까지 얻은 세계적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1935~77)의 경기고 49회 입학 동기(이회창·이홍구 전 총리 등)이자,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 무렵인 2021년 5월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은 흉상의 주인공인 세계적 반도체 학자 강대원 박사(1931~1992)의 경기고·서울대·오하이오 주립대 박사 직속 후배다.

세계적 학자와 동일한 출발선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 무렵인 2021년 5월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방문해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 무렵인 2021년 5월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방문해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뉴스1]

한국 출신으로 노벨 과학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휘소와 강대원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수상은 못 했지만 세상이 기억한다. 강기동은 아니다. 1970년대 초 한국이 아시아에서도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미국·일본 반도체 회사들의 하청 조립공장에 만족하고 있을 당시 세계서 가장 앞선 반도체 공정 기술을 한국에 들여왔음에도, 오히려 그 결단에 발목 잡혀 평생 미국에서 라디오 수선공으로 살며 잊힌 존재가 됐다. 미국에 핵무기를 가져다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처럼 그 역시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한 코리안 프로메테우스였다. 출발은 비슷했지만 종착역은 사뭇 다른 강대원과 강기원의 엇갈린 인생이 궁금했다. 올 초 미국에서 귀국해 한국 반도체 50주년 행사를 정부에 촉구하고 있는 강기동 박사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었다.

강기동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선 강대원을 알아야 한다. 그가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한 지난 1992년 5월 한국 언론엔 관련 기사 한 줄 없지만 뉴욕타임스는 비중 있는 부고 기사를 냈다. '반도체 분야 발명가'라는 제목 아래 1959년 당시 세계 최고 연구소인 벨연구소에 입사해 1960년 이집트 출신 아탈라 박사와 함께 트랜지스터 모스펫(MOS-FET)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플래시메모리 근간인 플로팅게이트를 발명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스튜어트 밸런타인 메달'을 수상(1975)했다고 전한다. 덧붙이자면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등이 받은 권위 있는 상이다. 또 1988년 벨연구소 은퇴 후 일본 NEC가 미국에 만든 NEC 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했다는 사실도 담았다.

사망 8년 후인 2000년 최초의 집적회로(IC)를 만든 공로로 잭 킬비가 노벨상을 받으며 "강대원의 모스펫 기술이 오늘날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CPU, D램 등 거의 모든 반도체가 모스펫 기반이라는 걸 고려할 때 결코 공치사가 아니다. 2009년 에디슨과 라이트 형제, 노벨 등이 오른 미 특허청의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기술 없이 텃세 만연했던 한국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 피가 조금만 섞여 있어도 '국뽕'에 취해 영웅 신화를 만들곤 하는 한국 사회가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세계 반도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 그를 몰랐다. 사후 20여년이 흐른 지난 2014년에야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가 개소 26주년 기념으로 그의 흉상을 세웠다. 2017년 '강대원상' 제정(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이어 2019년 1월 정부는 그를 '2018년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했다. 제1회 강대원상 시상식 직후 홍성주 당시 한국반도체학술대회장(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원장)은 언론 기고를 통해 그가 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는지 의문을 품었다. 결론은 "한국은 기초기술 연구보다 선진국 따라잡는 데 열중했기에, 강 박사 같은 연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을 것"이었다.

강기동 박사(맨 왼쪽) 부부 결혼식에 참석한 강대원 박사 가족. 강대원 박사의 아내는 신부 들러리를 직접 섰다. [사진 강기동]

강기동 박사(맨 왼쪽) 부부 결혼식에 참석한 강대원 박사 가족. 강대원 박사의 아내는 신부 들러리를 직접 섰다. [사진 강기동]

최근 10년간의 재평가 작업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뉴욕타임스 언급 이상의 정보를 얻기 어렵다. 한국 반도체 대부로 불리는 카이스트 김충기 명예교수조차 "10여분 정도 짧게 세 번의 대화를 나눈 게 전부"라고 할 정도다. 1977~85년 벨연구소에서 함께 근무했던 강성모 전 카이스트 총장도 과거 인터뷰에서 "당시 '두원 캉'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단편적 기억만 전했다. 정작 답은 그와 가까웠던 강기동이 알고 있었다.

"한때 강 선배는 한국 학계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기득권의 텃세로 뜻을 접었다고 나한테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한국을 방문했다가 실망만 안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는데 일본은 LED 연구로 1973년 노벨상을 받은 에사키 레오나 박사와 동급으로 그를 대접했다고 하더라. 한국 대신 일본 NEC가 세계적 메모리 회사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배경이다. 1974년 내가 만든 부천 공장을 찾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도 내 결정(한국행)을 응원하진 않았다. "

강기동 박사가 1960년대 모토로라 재직 중 썼던 명함. [사진 강기동]

강기동 박사가 1960년대 모토로라 재직 중 썼던 명함. [사진 강기동]

강기동은 1962년 박사 학위를 마치자마자 애리조나의 제조업체 모토로라를 선택했다. 인사차 연락했더니 강대원이 대뜸 "박사 출신이 생산공장에 가는 것은 잘못된 결정"이라며 면접에 붙은 IBM 연구소를 권했다. 하지만 그는 모토로라에 갔고, 여기서 인생을 바꾼 경험을 한다. 소련과 무기 경쟁이 한창이던 1965년 실전에 배치 중인 미국의 대륙 간 탄도 미사일 미니트맨 II의 결함을 바로잡는 미 공군 극비 프로젝트에 투입된 것이다. 논문은 7년간 금지, 해외여행은 미 국방성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기밀 서약을 한 터라 그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세계 최첨단 공장 세웠지만 

그러나 세계 최고 생산시설을 개발 설치하는 경험을 세 번이나 했고, 이게 몇 년 후 한국반도체 공장을 직접 설립하는 기반이 됐다. 그는 "19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이 세계 최초 C-MOS 공정 양산 공장"이라고 주장했다. 김충기 교수는 "세계 최초인지는 몰라도 당시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은 강 박사를 포함해 일본 연구자 등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인정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는 왜 강대원과 달리 한국에 돌아왔을까.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부친이 "우리나라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큰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지만, 한국 관료와 기업인들 역할이 컸다고 한다.

1967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강기동 박사. 박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가 강 박사. [사진 강기동]

1967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강기동 박사. 박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가 강 박사. [사진 강기동]

그중 한 사람이 당시 로스앤젤레스 총영사였던 고(故) 노신영 총리다. 강기동이 모토로라 투자 조사단 일원으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돌아온 이듬해인 1968년 노 총영사 부부가 집에 찾아와 "박 대통령이 국력을 기울여 하이테크를 추진하고 있다"며 조언을 구했다. 강기동은 "한국에 없는 기술을 갖고 가면 미 정부와 모토로라가 기술 유출로 제소할 게 뻔하다"며 나름 묘안을 담은 반도체사업계획서를 이광택 공사를 통해 한국에 보냈다.

이듬해 경기고 동창이자 쌍용 김성곤 창업자의 사위인 조해형 당시 쌍용그룹 기획업무 담당과 만나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자고 뜻을 모았다. 김성곤 회장이 네덜란드 필립스를 방문해 제휴를 타진하는 한편 구미에 공단 부지도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모토로라를 관두자마자 한국에 가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며 "1969년 서둘러 모토로라를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1971년 당시 공화당 정치인이었던 김성곤의 10·2 항명 파동으로 정권의 눈 밖에 나 사업을 접었다.

결국 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기업인 김규한 사장의 도움으로 한국반도체 설립 작업을 시작하고, 1974년 부천에 3인치 웨이퍼로 칩을 만드는 진짜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제소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ICII라는 회사를 차린 후 한국엔 하청 공장을 짓는 형식을 취했지만 김규한 사장의 KEMCO가 100% 투자했고, 그의 지분은 전혀 없었다. 1975년 전자 손목시계 칩을 400만개 수출하고, 삼성이 독자적 반도체 기술을 키우겠다는 '도쿄 선언'을 한 1983년 말 미국·일본(TI·모토로라·인텔·NEC·히타치·후지쓰)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내놓은 게 모두 이 부천 공장이었다.

라디오 수리공 된 반도체 엔지니어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반도체 공장인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1974년 모습. [중앙포토]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반도체 공장인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1974년 모습. [중앙포토]

그러나 삼성이 1977년 한국반도체 지분을 100% 인수하며 그는 쫓겨나다시피 한국을 떠났다. 그렇다고 미국 반도체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반도체에 관심을 보이는 대만·한국의 몇몇 기업과 인연을 이어가던 198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 미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또 한 번 반도체 계획서를 만들었고, 그렇게 1983년 현대전자(현 SK 하이닉스)의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삼성을 떠날 때처럼 그를 모함하는 세력이 있어 결국 또 미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한국 반도체업계와의 마지막 인연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고난 그 자체였다. 세계 최고 반도체 엔지니어가 생활고를 타개하려고 라디오 수리공이 됐다.

굳이 무게를 잴 필요는 없지만 한국보다 일본 반도체 발전에 더 기여한 학자의 재평가는 활발한데, 척박한 한국에 첨단 반도체 기술을 들고 와 직접 공장을 지었던 인물에 대한 인정은 너무 박해 아쉽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