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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할매’ 마가렛의 한센인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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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 광주총국장

최경호 광주총국장

“나이가 많아 더 이상 환자를 돌볼 수 없게 됐습니다.”

지난달 29일 선종한 마가렛 피사렉(88) 간호사가 2005년 11월 21일 남긴 편지 내용이다. ‘한센인의 어머니’로 불렸던 그는 동료 마리안느 스퇴거(89) 간호사와 함께 “부담을 주기 싫다”며 소록도를 떠났다. 당시 두 간호사가 한국생활을 정리할 때 짐은 여행가방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9년부터다.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구호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마리안느는 1962년, 마가렛은 1966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파견됐다.

40여년을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 [연합뉴스]

40여년을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 [연합뉴스]

고흥읍내에서 16㎞가량 떨어진 소록도는 ‘천형(天刑)의 땅’이라 불려왔다. 1934년 일본 총독부가 자혜의원을 소록도갱생원으로 개편하면서 한센인을 가두는 섬이 됐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박해와 격리 대상인 죄인 같은 삶을 살았다.

두 간호사는 한센인의 피와 눈물을 닦아주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항상 곁에서 약을 투약하고, 음식 섭취가 어려운 환자에게는 직접 우유를 먹여줬다. 소독할 때는 의사들도 만지기를 꺼리던 환자들의 짓무른 몸을 맨손으로 잡을 정도였다.

이들이 ‘한센인의 어머니’로 불린 것은 환자를 돌보는 일 외에도 모든 일에 헌신을 다했기 때문이다. 소록도 내 한센인 치료를 위한 결핵병동이나 소아병원인 영아원 등을 지을 때마다 힘을 보탰다. 결혼·출산 등을 이유로 강제 퇴원한 환자를 위해선 주변에 도움을 청해 정착금도 마련해줬다.

두 간호사는 40여년간 봉사하면서 한 푼의 보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철저하게 빈손으로 살며 20대 청춘부터 70대까지 헌신과 사랑을 실천했다. 2005년 소록도를 떠날 때는 “나이가 70이 넘었다. 본국으로 돌아간다”며 홀연히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소록도 천사들의 소식은 고흥주민 등에게 안타까움을 줬다. 마리안느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후 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당시 마가렛도 경증 치매를 앓으며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후 마리안느는 2016년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때 소록도를 방문했으나 마가렛은 건강 악화로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평생 ‘소록도 할매’로 불리길 원했다는 마가렛은 한국 생활을 떠올리며 항상 “행복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소록도에 대한 애정은 2017년 9월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김연준 신부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 신부는 “소록도에 살던 이웃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었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했다”고 말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세월이 지나도 한센인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느껴졌다는 취지다. 우리가 마가렛을 한센인의 어머니로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