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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황인숙, ‘종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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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소연 시인

김소연 시인

1988년 봄, 황인숙 시인은 첫 시집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를 출간한다. 하늘로부터 자유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게 자유를 부여해주는 새를 우리에게 제시한 시인의 등장이었다. 시인은 늘 거리에 있었다. 거리에서 시인에게 다가온 풍경을 시인은 풍경으로 대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것도 시인은 날씨로 대하지 않았다. 시인은 그것들의 변화무쌍함을 골똘히 지켜보았고 그 안에 깃든 생명력을 기어이 찾아냈다.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선언했던 시인의 활기와 탄성이 시에 가득했다.

시인이 사랑한 단어

시인이 사랑한 단어

2023년 가을, 시인은 여덟 번째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를 출간한다. 시인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시인의 이웃들이 등장이 잦지만, 여전히 행인들이 등장한다. 시인은 여전히 이들을 ‘행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타자화하지 않는다. 이들의 삶에 찰나로나마 깊숙하게 개입한다. 아는 이웃과 모르는 이웃을 구분 짓지 않는다. 시집 뒤표지에 실린 ‘집 없는 여자’에 대한 글은 시인이 자신의 시세계를 보다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거야 내가 남자라면/ 30분만. 한 시간만. 딱 10분만!/ 저 탐스러운 버스 정류장 벤치/ 저 탐스러운 계단참/ 아, 탐스러운 카페테라스/ 집에 가면 잘 수 있다/ 집에 가면 잘 수 있어/ 길 위의 여자 비틀걸음 옮기며 중얼거린다.’

시가 꿈꾸는 종착지와도 같은 ‘자유’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황인숙의 ‘종아리’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내 삶의 예쁜 종아리’)라며 거리에서 중얼거리는 시인. ‘내 삶의 예쁜 종아리’라는 표현은 거리에서 거의 모든 시를 발견해온 시인이므로 그 자긍심이 더욱더 묵직한 리얼리티가 된다. 묵직한 리얼리티조차 이렇게나 명랑하게 표현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가 꿈꾸는 종착지가 아닐까.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