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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 들인 ‘노인용 모노레일’ 1년 방치…남해군의 황당한 이유 [르포]

중앙일보

입력

섬 노인 잡는 오르막길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폭우가 쏟아진 지난달 20일 낮 12시40분쯤 경남 남해군 상주면 노도(櫓島). 이 섬에 사는 문모(80대) 할머니가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몸을 90도로 숙인 채 양손으로 힘겹게 보행기를 밀어 올리는 중이었다. 보행기에는 뭍에서 사 온 새송이버섯 한 박스(6㎏)가 실려 있었다. 허리보호대를 착용한 그는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오르막길 정상부에 다다르기까지 10분이 넘게 걸렸다. 30대 중반인 기자는 1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집 앞에 도착한 할머니는 “젊어서는. 헉헉. 팔팔했는데. 헉헉”이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허리 뿌라지고(부러지고) 난 뒤부턴 너무 대다(힘들다)”며 “(뭍에) 장 보러 나가거나 병원 가는 날 아니면 안 내려간다”고 말했다.

승용차도 버거운 경사…“무릎 수술 안 한 사람 없어”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9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9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문 할머니가 오른 마을길 구간(길이 78m)은 경사도가 최고 30.55%(경사각 16~17도)다. 스키장 상급자 코스(경사도 20~30%) 수준이다. 경사도 12% 이상이면 승용차도 오르기도 버겁다고 한다. 삿갓과 닮아 ‘삿갓섬’으로 불리는 노도는 섬 자체가 경사가 급한 지역이다. 노도마을 주민 22명은 대다수가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내리기 어려운 70대 이상이다.

하지만 마을이 섬 중턱에 있다 보니 주민들은 이런 마을길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뭍으로 갈 배를 타기 위해선 마을 아래 노도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경사가 완만한 다른 마을길도 있지만, 거리가 3배 넘게 긴 탓에 빙 둘러가야 한다.

경남 남해군 노도. 섬 중턱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 섬 중턱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마을 무더위심터. 노도 모노레일 정상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마을 무더위심터. 노도 모노레일 정상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안대훈 기자

노도마을 무더위쉼터(29.7㎡)에서 만난 박모(90대) 할머니는 “저 아래 넓은 마을쉼터(71.5㎡)가 있는데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 힘들어서 아무도 안 가고 여기만 있다”고 했다. 옆에 있던 70대 할머니는 “길이 하도 까꾸막(오르막·경남 사투리)해서 무릎 연골 수술 안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노인 위한 모노레일…1년 반 넘게 방치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에서 80대 할머니가 힘겹게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고 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은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다. 안대훈 기자

이 섬에는 이런 주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다. 남해군에 따르면 군은 지난해 2월 노도에 길이 78m의 모노레일을 설치했다. 섬 발전 촉진법에 따라 4억9500만원(국비)이 투입됐다. 별도 운전자가 없는 엘리베이터 같은 자동화 시설로, 한 번에 6명까지 탈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노도 모노레일은 1년 반 넘게 운행하지 못하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남해군이 궤도운송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사전에 안전 관리 조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 편하게 섬을 오르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주민은 크게 실망하고 있다.

궤도 시설인 모노레일을 운행하려면 산업안전산업기사(삭도안전관리자) 자격증을 소지하거나 모노레일 안전관리 업무 경력을 가진 안전관리자가 필요하다. 또 올해 초 한국교통안전공단 점검 결과, 추락 방지 난간 등 안전 시설물도 보강해야 한다.

남해군 “올해 안엔 정상 운영”

경남 남해군 노도에 설치된 모노레일 승강장.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으면서 차량은 다른 곳에 옮겨둔 상태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노도에 설치된 모노레일 승강장. 1년 반이 넘도록 운행하지 않으면서 차량은 다른 곳에 옮겨둔 상태다. 안대훈 기자

남해군은 시설물 보강에 약 5000만원(군비)이 들 것으로 보고 있다. 안전관리자 예산은 연 2000만원으로 잡혔다. 군은 별도 인력을 채용하기엔 예산이 부족한 탓에 한 달에 2~3번 섬을 찾아 안전 점검할 수 있는 지역 업체를 찾고 있다.

군 관계자는 “시설을 지어놓고 법 기준을 맞춰가고 있다. 예산도 한정적인 데다 남해에서 (안전관리) 자격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며 “올해 안에는 정상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노도항 바로 앞에 '문학의 섬'이라고 적힌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노도는 '구운몽'을 쓴 조선 중기 문신인 서포 김만중 선생의 마지막 유배지로 알려진 섬이다. 안대훈 기자

경남 남해군 상주면 노도항 바로 앞에 '문학의 섬'이라고 적힌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노도는 '구운몽'을 쓴 조선 중기 문신인 서포 김만중 선생의 마지막 유배지로 알려진 섬이다. 안대훈 기자

한편, 남해 노도는 서포 김만중(1637~1692) 선생 유배지로 유명하다. 조선 중기 문신인 김만중은 유배 중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집필했다. 그는 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가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시신을 잠시 묻었던 허묘(墟墓), 초옥이 있던 터 등이 노도에 남아 있다. 노도항 바로 앞에는 ‘노도 문학의 섬’이라고 적힌 거대한 조형물인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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