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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나니 죽어 있었다”…이은해 사건 떠오른 이 남자의 운명

중앙일보

입력

폭행 및 살인사건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폭행 및 살인사건 관련 일러스트. 중앙포토

-여보세요…
=네 112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인데…제 강아지를 목 조르고 죽이려고 해가지고…제가 방어하다가 진짜 하지말라고…이렇게 방어하다가 죽인 것 같아요. 술 먹고…

지난해 5월 14일 저녁 8시 57분 112 상황실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0대 남성 A씨였다.

A씨는 같은 날 새벽 3시 22분쯤 동성애자 전용 즉석만남 앱(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집으로 남성 B씨를 초대했다. 둘은 640㎖들이 소주 3병을 나눠마시다 부족하자 새벽 5시 54분경 편의점에서 다시 같은 소주 3병을 추가로 구입해 술판을 이어갔다.

둘이 술을 마시는 데 A씨의 반려견(닥스훈트 종)이 안주를 먹어버리는 등 성가시게 하자, B씨는 반려견을 밀치거나 목을 조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반복했다. A씨는 2018년 입양 후 가족처럼 의지하던 반려견을 B씨가 거칠게 대하자 격분해 주방에서 과도를 집어들고 B씨에게 휘둘렀다. 새벽 7시쯤이었다. 칼은 방어하려던 B씨 왼팔뚝을 그대로 관통했고, A씨는 도망가는 B씨를 계속 따라다니며 집안 곳곳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이미 동맥이 절단된 B씨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로 온 집안이 물들었다. 이후 B씨는 A씨의 추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작은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B씨는 그 방 안에서 과다출혈로 오후 3시쯤 목숨을 잃었다.

술에 취한 A씨는 B씨를 방치한 채 오전 8시쯤 잠이 들어 오후 4시에나 눈을 떴다. 사망한 B씨를 발견한 A씨는 신고 전화를 걸기 전에 ‘살인죄 공소시효’, ‘살인죄 형량’ 등을 인터넷에 검색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살인을 한 것일까.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해 살인?

A씨는 수사과정에서 흉기를 들고 경고하긴 했지만 휘두른 적은 없다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A씨를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B씨에게 심한 출혈이 발생했고, 스스로 구조요청을 할 수 없음을 아는 A씨가 B씨를 내버려 둔 채 잠을 자는 등 장시간 아무런 구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 살인행위(부작위에 의한 살인)라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에서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의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됐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형법에 별도로 규정돼 있지는 않지만 형법 18조(부작위범)의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 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 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는 내용이 처벌의 근거가 된다. 지난 21일 대법원이 수영을 못 하는 남편을 계곡에서 뛰어내리게 유도한 뒤 구조하지 않아 사망케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이은해에게 무기징역형을 확정한 것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인정한 결과였다. A씨 사건의 1심 재판부도 살인죄를 인정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약 8시간 동안 B씨를 내버려 둔 것이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적 원인으로 보고 부작위에 의한 살인 행위를 인정했다.

“죽이려던 건 아닌데”…그래도 살인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재판에선 A씨에게 B씨를 죽이려는 고의가 있었는지도 쟁점이 됐다. 이 지점에서 1심과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인정했지만 A씨의 형량을 15년에서 10년형으로 확 낮췄다. 1심은 “피해자에게 다량의 출혈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피해자가 사망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피고인이 ‘살인죄’를 검색했다는 사정도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이라며 확정적 고의를 인정했다.

2심은 ‘미필적 고의’만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미필적 고의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정도의 고의로 양형기준에서 감경요인이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범행 당시 술로 인하여 정상적인 사리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피해자를 장시간 방치한 부작위는 술로 인한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며 “확정적 고의가 아닌 미필적 고의로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지난달 31일 대법원은 이런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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