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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끊었던 엄마도 "1일 1사진 보내줘"...레즈비언 부부 '육아 근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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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라니 출산 후 처음으로 온식구가 추석 명절을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김규진씨·라니·김세연씨. 사진 김규진씨 제공

지난 28일 라니 출산 후 처음으로 온식구가 추석 명절을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김규진씨·라니·김세연씨. 사진 김규진씨 제공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은 아이가 있다. 레즈비언 부부 김규진(32)·김세연(35)씨의 딸 ‘라니’(태명)다.

라니는 지난 8월 30일 새벽4시 30분 인생의 첫발을 내딛었다. 두 엄마가 결혼식을 올린지 약 4년, 그리고 라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지 두 달만이었다. 라니가 태어난 날 엄마 규진씨는 SNS에 당당히  ‘오출완(오늘 출산 완료)’을 인증했다.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 동성커플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김규진씨를 만나 들어봤다.

지난 27일 진행된 인터뷰엔 김규진씨의 아내 세연씨도 함께했다. 규진씨와 달리 모습을 공개하지 않던 그는 최근 언론 앞에 섰다. 지난 7월엔 ‘대한민국 저출생대책 간담회 겸 베이비샤워’라는 행사에도 등장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차피 아기 엄마로 커밍아웃 해야 하는데 한 번에 해버리자.” 세연씨의 말이다.

‘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김씨 부부는 그만큼 더 열심히 알리고, 더 열심히 축하받는다. 앞으로 라니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다. 여느 초보맘들 처럼 맘카페를 들여다보며 ‘아이가 건강하면 됐다’와 ‘그래도 영어 학원 정도는 보내야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모(母母)에게 지난 한 달간 육아 근황을 들었다.

축복의 길에 마주한 현실의 벽

라니를 만난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아기가 태어난 순간 어떤 기분이었나요.
규진=저희 둘 다 감성적인 사람들은 아니어서요. (웃음) 눈물 뚝뚝 흘리기보다는 “드디어 성공했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내가 마취과 의사이긴 하지만 분만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는데, 옆에서 “아파야 자궁 문이 열리니까 아직 마취하면 안 돼”라고 오히려 차분하게 설명해주더라고요. 
세연=(규진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다 아기가 ‘응애’하고 나왔는데 ‘와 어떻게 나왔지?’ 싶었고요. 
아기가 태어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규진=일단 갑자기 대가족이 됐어요. 원래는 저희 둘, 그리고 고양이 두 마리가 사는 집이었는데 지금은 라니에, 라니를 돌봐주시는 산후관리사님도 함께 계세요. 집이 복닥복닥해졌다고 할까요.

해외에 계시는 부모님과 연락을 자주 하게 된 것도 큰 변화죠. 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거든요. 커밍아웃한 이후 한동안 연이 끊겼다가, 결혼한 뒤에는 한 달에 한 번 대화하는 정도. 그랬던 어머니가 이제는 “1일 1사진 필수로 보내라”고 하세요. 육아도 도와주고 싶어 하시고 선물도 주고 싶어하시고. 라니를 낳으면서 부모님과 갑자기 더 가까워졌어요.

지난 7월 라니가 태어나기 전 초음파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지난 7월 라니가 태어나기 전 초음파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주변에서도 많은 축하를 해주셨어요. 규진님 SNS만 봐도 댓글에 응원 메시지가 쏟아지더라고요.
규진=임신했을 때부터 기사가 많이 나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오가는 축하보다 수십 배 이상의 축하를 받은 것 같아요. 서서히 멀어졌던 지인들한테도, 회사에서 직접 알지 못했던 분들한테도 응원 메시지가 왔어요. 심지어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 나온 강아지를 귀여워 해줬는데 나중에 견주분이 SNS로 “기사에서 봤다. 정말 축하드린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죠. 감사했어요.  
세연=임신·출산 이야기를 꺼내기 전엔 제가 커밍아웃을 해도,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넘겨짚었어요.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은 병원·조리원에서 마주친 50~60대 직원분들의 생각보다 열린 마음과 호의적인 반응에 놀랐어요.

기사에 악플만 달리는 것 같지만 저희가 느끼는 주변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변화하고 있어요. 동성애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최근 몇 달간 시민의식은 행정 시스템보다 훨씬 올라와 있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어요. 

이들이 처음 임신 사실을 공개했을 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다. 4년 전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렸을 때만 해도 임신은 커녕 결혼마저 이들에겐 야망이었다. 규진씨 부모님은 딸의 결혼을 축하해 줄 수 없었고, 세연씨 부모님은 아예 딸과 돌아서는 쪽을 택했다.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처음 고민하게 된 건 프랑스에서 만난 규진씨의 직장 상사가 어느날 던진 ‘애는 낳을 거지?’라는 질문에서부터였다.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한 규진씨는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기증받은 정자로 인공수정에 성공했다. 이후 지난 6월엔 ‘만삭샷’으로 언론에 이 사실을 처음 알렸다.

지난 한 달간 모모(母母) 가정으로서 겪은 제도적 벽이 있었다면. 
규진=출생신고를 할 때요. 안 될 걸 알면서도 일단은 ‘부(父)’에 ‘김세연’ 석 자를 써냈어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접수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상대로 불수리 됐고 사유서에는 ‘모(母)는 출산한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김규진만 모가 될 수 있고 부(父)는 (김세연과 같이) 여성일 수 없으므로 불수리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결국 양육자가 두 명임에도 한 부모 가정이 됐죠. 한 가지 개선된 부분이 있다면, 4년 전 혼인신고를 할 땐 접수 가능 여부를 따지는 데에만 4시간을 기다렸음에도 결국 못했는데 이번엔 접수 자체는 가능해졌어요. 
세연=저는배우자로 인정이 안 되다 보니 당장 직장에서도 출산·육아 휴가를 받을 수 없어요. 저희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한 아이를 기르고 있는데 그게 법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 자꾸만 ‘아이의 보호자는 한 명’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출산 후 정말 많은 분이 저희 가족을 축복해주셔서 희망에 부풀다가도 법적인 문제 앞에선 다시 현실로 돌아와요. 
규진=임신 8주 때부터 병원과 조리원에 동성부부 입원 동의를 구하고 다녔어요. 모두 흔쾌히 허락해주시고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셨지만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배려나 인정에 기댈 수는 없어요. 동성부부도 한 가족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4일 태어난 지 5일 된 라니의 모습.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지난 4일 태어난 지 5일 된 라니의 모습.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라니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레즈비언·게이·이성 부부 중 육아, 가사 역할 분담을 가장 평등하게 하는 가정은 레즈비언 부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분담하고 계시는지요.
규진=육아든 가사든 나눠 한다기보다 같이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기가 새벽에 자다가 깨서 막 울면 먼저 눈 뜬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아기를 안고 그다음 사람은 빨리 분유를 타는 식. 쉬고 싶을 땐 편하게 ‘다음은 언니가 해 줘’ 하고 말하고 언니도 마찬가지고요. 
세연=출산 휴가 3개월을 받은 규진이가 아예 받지 못한 저보다 육아에 몰입될 수밖에 없는 건 안타까워요. 가뜩이나 출산 후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규진이가 힘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세연씨도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을까요. 
세연=아이를 여러 명 키워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해요. 하지만 제가 출산을 하기엔 벌써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고 있고. 직장도 그만 둬야 해서 쉽지 않아요. 벨기에 정자은행에 가서 한 달에 한 번씩 3-4번 정도는 임신 시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한 명도 벅차서 일단 라니부터 잘 키워보려고요.  
라니가 태어나기 전 찍은 가족 사진. 반려묘 페퍼와 퓨리도 있다.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라니가 태어나기 전 찍은 가족 사진. 반려묘 페퍼와 퓨리도 있다. 사진 김씨 인스타그램 캡처

이번 추석은 라니와의 첫 명절이에요. 특별한 계획이 있으실까요.  
규진= 집에 퀴어 친구들 몇 명이 아이를 보러 놀러 오기로 했어요. 사실 퀴어들은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명절을 안 쇠는 경우가 많아요. 괜히 친척들과 갈등 생길 일을 만들지 싶지 않은 거죠. 저 역시 명절을 ‘서울에서 맛집 줄 안 서도 되는 날’ 정도로만 생각해 왔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제 라니가 생겼으니 아이가 크면 같이 ‘롯데월드 눈치게임 하러 가는 날’이 되지 않을까요. (웃음)
세연= 유치원에서 분명 연휴가 끝나면 집에서 뭐 했는지 물어볼 텐데 ‘제사, 송편 빚기’ 등 간소하게라도 흉내는 내야 할 것 같아요.  
라니를 한국에서 키우실 계획이라고 들었어요. 작게는 ‘학부모 참관일’부터 크게는 ‘아이가 받을 시선’에 대해 걱정되실 것 같기도 한데요.
규진= 아내는 사실 엄마가 둘인 것보다도 ‘엄마가 너무 나이 든 것 아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해요. (웃음) 댓글을 보면 ‘생각 없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나중에 받을 상처는 생각 안 하냐’ 이런 글들이 많은데 임신부터 출산까지 매 순간이 생각의 과정이었어요. 라니에게 우리 사회엔 다양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아빠와만 사는 친구, 할머니와만 사는 친구, 외국인 부모님과 사는 친구도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집은 엄마가 두 명 있는 집이고 둘 다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에요. 
두 분께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세연= 사랑이든 이와 비슷한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됐든 그런 게 바탕이 되면 상대방을 포용하게 돼요. 이 복잡한 세상 모두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어요. 사랑은 100%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규진= 요즘 보면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사랑하면 상처도 받으니까.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크니까. 그래도 많이 사랑할수록 이득이에요. 언니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면 이해의 폭과 함께 기쁨의 폭도 커져요. 어쩌면 이 한국사회에 대해 제가 가진 기대와 믿음을 놓지 않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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