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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긴 학교" 물에 잠겨도 안다…운문댐 수몰민 멀고먼 성묘길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 지역에 살던 이들이 K-water가 지원한 선박을 타고 선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 지역에 살던 이들이 K-water가 지원한 선박을 타고 선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저기가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있던 자리고, 이 일대는 벼농사를 짓던 벌판이었죠.”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 만난 김광호(64·서울 송파구)씨가 호수 주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이렇게 설명했다. 남들이 보기엔 운문호를 가득 메운 물이 찰랑거리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겐 옛날 마을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이곳에는 과거 김씨의 고향 마을이 있었다.

김씨는 10인승 선박을 타고 운문호를 가로지르면서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초·중·고를 이곳에서 모두 나왔다. 친구들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했다.

“저기가 학교였다”…기억 생생

그는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러 왔다고 했다. 김씨뿐 아니라 10명 남짓한 성묘객이 이날 오전 8시30분 K-water 운문권지사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다. 예초기와 낫·갈고리를 양손에 들고 작업복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이들은 벌초하러 산으로 올라가는 대신 배를 타고 운문호를 가로질렀다.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민 김광호씨가 자신이 살던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다추석. 김정석 기자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민 김광호씨가 자신이 살던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다추석. 김정석 기자

이들이 배를 타고 벌초를 겸한 성묘를 하러 간 까닭은 고향이 운문호 물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운문댐이 건설되면서 운문면 일대 7개 리(里) 단위 마을이 수몰됐다.

청도군에 따르면 운문댐 건설로 대천리(221가구)순지리(113가구)·방음리(63가구)·오진리(35가구)·서지리(85가구)·공암리(74가구)·지촌리(66가구)에서 총 657가구가 물에 잠겼다. 운문초와 지촌초, 문명중·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운문댐은 1985년 착공, 1996년 완공됐다. 주민들은 91년부터 96년까지 6년에 걸쳐 이주했다. 운문댐 건설로 생긴 운문호는 현재 대구 동구·수성구·북구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운문댐 건설로 고향 떠난 이들, 명절 맞아 성묘

운문호 한쪽에는 망향정도 있다. 댐 조성으로 고향을 잃은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정자다. 망향정 안쪽에는 실향민 추억과 향수가 담긴 사진이 전시돼 있다. 망향정 옆에는 수몰 가구가 적힌 명단 비도 있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 전경. 김정석 기자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 전경. 김정석 기자

수몰민 애환을 시로 노래한 시인도 있다. 운문면 수몰 마을이 고향인 김술곤 시인은 2011년 ‘수몰 저쪽’이라는 시를 통해 ‘반시감 붉게 익어 마을 한 폭 놀빛이던/그때 그 감나무들 운문댐에 다 잠긴 후/더러는 수돗물에서 감잎차 맛이 난다…(중략)…다슬기 눈을 뜨는 모천의 댐 수위를/절반은 마음속에 낮춰가며 살아야겠다’고 썼다.

고향은 물에 잠겼지만, 인근 선산에 산소를 모신 이들은 매년 추석이 되면 벌초를 겸한 성묘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K-water와 청도군은 선박을 지원해 수몰민 성묘를 돕고 있다. 올해는 지난 17일과 23일, 24일 등 세 차례 지원했다. 매년 300명 이상이 선박을 이용한다. 이날도 30여 명이 선박을 타고 가 성묘했다.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K-water가 지원한 선박을 타고 선산 자락에 다다른 성묘객들이 벌초 장비를 들고 배에서 내리고 있다. 김정석 기자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K-water가 지원한 선박을 타고 선산 자락에 다다른 성묘객들이 벌초 장비를 들고 배에서 내리고 있다. 김정석 기자

친척과 함께 벌초에 나선 김상우(64·경기 수원)씨는 “어제 고향에 내려와 육로로 닿을 수 있는 산소를 먼저 벌초했다”며 “배를 타고 운문호를 건너 벌초를 가는 길이 멀긴 하지만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K-water·청도군, 수몰 지역 성묘객 선박 수송

매년 벌초를 하기 위해 뭉친다는 최윤석(63)·준석(60)·대석(51) 삼형제는 “3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 어디에 다리가 있었는지 어디에 학교가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며 “K-water와 청도군에서 선박 수송 지원을 해줘 수월하게 성묘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 지역에 살던 이들이 K-water가 지원한 선박에 탑승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호에서 수몰 지역에 살던 이들이 K-water가 지원한 선박에 탑승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김기호 K-water 운문권지사 관리부 차장은 “운문댐 건설로 부득이하게 고향을 잃게 된 이들이 성묘와 벌초를 편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최대한 돕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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