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랑 지참금 얼마길래...'韓과 저출산 닮음꼴' 태국 황당 현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왜 젊은 세대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을까요. 출산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저출산은 우리 사회를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요즘 상황을 전하는 듯한 이 뉴스는 실은 태국에 대한 보도다. 지난해 2월 태국의 공영방송 ‘타이 PBS’가 태국 최초의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아지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현상)를 계기로 보도한 뉴스다.

이어 방송은 '신생아 수가 30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수도에서 먼 대학부터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해 줄줄이 미달 사태를 맞다' 등의 뉴스를 연달아 내보냈다. 뉴스에 비친 태국의 모습은 저출산 고령화에 시달리는 한국과 무척 닮았다. 개발도상국인 태국이 '선진국병'이라는 저출산 현상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국 공영방송 'Thai PBS'가 태국 첫 인구 데드 크로스(dead cross) 소식을 전하고 있다. 'Thai PBS' 캡처

태국 공영방송 'Thai PBS'가 태국 첫 인구 데드 크로스(dead cross) 소식을 전하고 있다. 'Thai PBS' 캡처

‘0명대 출산율’...한국과 판박이인 태국

유엔(UN) 인구예측조사에 따르면 올 9월 기준 태국 합계출산율은 0.95명이다. 이대로라면 '0명대 추락'이 확실시된다. 지난해 71년 만의 최저 출산율 1.00명(태국 국가경제사회개발위원회)로 충격을 겪었던 태국 사회가 다시 일 년도 안 돼 다시 뒤숭숭하다. 한국의 합계출산율(2분기 0.70명) 추세를 따라오는 분위기다.

중위연령(인구를 나이순으로 줄 세웠을 때 중앙에 있는 나이)도 한국과 비슷하다. 태국의 중위연령은 41세로 한국(45세)보다 4년 젊을 뿐이다. 양국 다 ‘아저씨 나라’인 셈이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이웃 국가와 비교하면 태국의 고령화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태국과 국경을 맞댄 라오스는 중위연령이 25세, 라오스 옆에 있는 베트남 32세다. 블룸버그통신이 “세계 최초 개발도상국의 출산율 급감”이라고 표현할 만큼 저출산, 고령화의 속도가 빠르다.

태국의 출산율 감소엔 결혼적령기 남녀는 결혼비용을 감당 못 해 결혼을 미루는 세태, 기혼자들이 과도한 교육비 지출과 늘어나는 가계부채로 출산을 꺼리는 풍조 등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저출산을 좀처럼 극복하는 못하는 한국 사회와 유사한 면도 있다.

신랑이 ‘신솟’ 내야 결혼 가능  

태국 방콕에 사는 새티안타나세트 아파원(32)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태국에선 ‘신솟(Sin Sod)’을 내야 신부와 결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솟은 신랑이 신부 집안에 내야 하는 일종의 지참금이다. 신부를 잘 키운 신부 집안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신랑의 경제적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신랑이 신부 집안에게 지불하는 지참금인 신솟(Sin Sod). 신솟을 올려놓고 결혼식을 치르기도 한다. X(옛 트위터) 캡처.

신랑이 신부 집안에게 지불하는 지참금인 신솟(Sin Sod). 신솟을 올려놓고 결혼식을 치르기도 한다. X(옛 트위터) 캡처.

전통적 결혼관에서 나온 신솟은 현대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파원은 “요즘에도 신솟 없는 결혼은 무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여전히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라 신솟을 받지 못한 결혼은 부끄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솟값도 치솟고 있다. 예전엔 통상 10만 바트(약 370만원) 정도 내면 됐던 신솟은 요즘 신부가 대학을 졸업했을 경우 30만 바트(약 1100만원)가 보통이라고 한다. 신솟은 신부가 고소득·고학력일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높아진다. 태국 여성과 결혼하는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한 한국인 유튜버는 신솟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1200만원을 모았다는 영상을 올려 화제가 됐다.

올해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아시아 웨딩 페스티벌에서 태국 대표단이 결혼식 관습과 문화적 전통을 선보이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올해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아시아 웨딩 페스티벌에서 태국 대표단이 결혼식 관습과 문화적 전통을 선보이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치솟는 신솟값은 태국에서 결혼의 걸림돌이 된다. 신솟을 마련하지 못해 신랑이 돈을 훔치다 적발돼 결혼식이 무산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태국 매체 타이랏에 따르면 지난해 태국 북부의 깜팽팻 지역에 사는 한 남성은 합의된 신솟 비용 10만 바트(약 370만원)를 마련하지 못해 대낮에 한 가정집에서 1만 바트(약 37만원)를 훔치다 잡혔다.

최근엔 경제난과 맞물려 ‘신솟 임대 사업’까지 생겼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예비신랑이 신솟을 마련할 수 있게 관련 비용을 대출하는 사업이다. 아파원은 “결혼 등에 신솟 비용이나 다이아몬드 등 장신구를 잠깐 빌리고 끝난 뒤 반납하는 사업도 성행한다. 이자는 빌린 일수 단위로 계산된다”고 전했다.

신솟 문화는 최근 유행하는 한국의 청혼 방식을 조명한 지난 6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WSJ은 ‘결혼식 전 비싼 장애물: 4500달러짜리 청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하루 숙박비 100만원의 고급 호텔과 명품 가방, 보석을 선물을 포함해 약 600만원은 드는 비싼 청혼이 한국의 일반적인 청혼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도했다.

신속을 포함한 결혼 비용 부담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태국 혼인 건수는 2019년 약 32만 8000건에서 2021년 약 24만 건으로 약 8만 건 정도 줄었다. 결혼에 드는 제반 비용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 한국 청년의 모습과 유사하다. 지난달 28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로 살펴본 청년의 의식변화’에 따르면, 2022년 기준 19~34세 청년의 33.7%(남성 40.9%, 여성 26.4%)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로 결혼 자금 부족을 꼽았다.

교육비, 가계부채…한국과 닮은 태국

결혼한 태국인들이 애 낳기를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비다. 현지 매체 더네이션은 “감당하기 힘든 교육비가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태국 일간지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2023년 태국의 평균 자녀 교육비 지출액은 1만 9500바트(76만원)다. 태국의 올해 법정 최저임금 기준으로 한 달 월급(75만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셈이다. 태국 상공회의소 대학교(UTCC)의 조사에 따르면 태국 학부모 3명 중 1명은 신학기 교육비 지출이 버겁다고 응답했다.

태국의 높은 교육열을 담은 2017년 영화 '배드 지니어스' X(옛 트위터) 캡처.

태국의 높은 교육열을 담은 2017년 영화 '배드 지니어스' X(옛 트위터) 캡처.

태국은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다. 또한 태국의 대학사회도 한국처럼 서열화됐다. 태국엔 총 170여 곳의 국립대와 사립대가 있는데, 한국의 서울대 격인 출라롱꼰 대학을 정점으로 탐마삿, 까셋삿 등 명문대가 군림하는 구조다.

이 때문에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열이 높고 교육비도 많이 든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태국의 왜곡된 교육열을 묘사한 영화로 화제가 됐다. 가난한 천재 소녀 ‘린’이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 격인 SAT를 잘 치기 위해 부정행위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서울 모 학원의 SAT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교육비 등에 허덕이는 사이 태국인 3명 중 1명은 빚에 시달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최근 태국 중앙은행 부총재는 태국 가계 부채의 3분의 2는 소비를 목적으로 한 대출이라고 했는데, 이중 자녀 교육비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로이터통신도 "태국의 높은 교육비와 늘어나는 가계 부채로 태국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한다"고 보도했다. 결혼한 지 14년째인 친타팁 난타봉(45)은“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큰 비용이 든다. 유치원 한 학기에 이미 5만(약 185만원)~6만(222만)바트가 들고 아이가 더 크면 수백만 바트가 더 든다”라며 출산을 미루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2022년 기준 태국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967만원인 걸 감안하면 교육비에 절반 가까운 소득을 쓰는 셈이다.

저출산 대책이 ‘마법약?’ 시원찮은 정부 대책

정부의 대책에 신통치 않다는 점도 한국과 닮은꼴이다. 태국 최초의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가 발표된 다음 날 태국 국가보건의료안전청(NHSO)은 15세 이상 시민에게 무료로 콘돔과 피임약을 나눠주겠다고 밝혔다. 안전한 섹스를 장려해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보건부는 싱글 남녀 데이트 행사를 진행하는 한편 20세~34세 이상 여성에게 철분과 엽산 보충제를 나눠주는 캠페인을 펼쳤다. 임신부에 도움되는 약을 제공하는 대책은 5년 전에도 시행된 적 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태국 정부가 출산율 급감 소식에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마법약(Magic Pill)’이라며 철분과 엽산을 나눠줬다”고 보도했다.

이달 초 태국 아누꾼핏깨우 사회개발복지국장(DSDW)은 빈곤층 아동에 월 600바트(2만원) 수당 지급을 확대해 출산을 장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두고 방콕포스트는 “피상적인 대책으로 결과를 내기는 힘들 것”이라며 “구조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위원은 “태국과 한국의 출산율 문제의 공통점은 문화적・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이라며 “정부 중심의 공급자 마인드로는 저출산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