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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기시다, 디플레 탈출 승부수…임금상승 막은 ‘3개 허들’ 허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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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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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의 두꺼운 틀을 깨고 과감한 경제혁신에 나선다. 핵심은 소득 증대 정책이다. 임금을 올려야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본 경제가 다시 성장궤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규제를 대폭 손질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오는 10월까지 ▶물가상승 부담 완화 ▶지속적 임금 인상 ▶반도체·배터리 국내생산 지원 ▶인구 감소를 뛰어넘는 사회변혁 ▶국민 안전 보장 등 5대 경제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26일 각료들에게 이 같은 내용을 통보했다. 기시다 총리는 “국민을 물가 고통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최근 수입물가가 치솟으면서 전례 없던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경제대책은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기시다의 승부수가 될 전망이다.

기시다 “물가 고통서 벗어나게 하겠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을 내수 침체에 빠뜨린 임금 구조 개혁에 칼을 뽑았다. 일본에는 ‘3개의 임금 허들’이라 불리는 임금 억제 장치가 있다. 연봉이 ‘103만엔’ ‘106만엔’ ‘130만엔’을 넘어설 때마다 임금 허들이 기다린다. 문제는 이 ‘3중 허들’이 여성, 특히 기혼 여성의 재취업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연봉이 103만엔을 넘으면 배우자 수당이 나오지 않는다. 종업원 101명 이상인 기업의 근로자는 보험료 부담이 본격화한다. 또 연봉 130만엔을 넘기면 배우자의 사회보험 부양자 대상에서 탈락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이렇게 3중으로 설치된 임금 허들은 일본 기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 파트타임이나 한시적 근로자로 취업할 기회가 많아도 자칫 임금 허들에 걸리면 남편의 사회보험 부양자에서 제외되거나 배우자 수당이 나오지 않게 된다. 소득이 늘면 오히려 가계 전체로는 손에 쥐는 돈이 줄어드는 구조다. 취업의 기회를 아예 싹부터 잘라버리는 나쁜 제도다. 일본 정부는 재정을 동원해 1인당 50만엔까지 지원해서라도 임금 허들을 허물어보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일본은 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민생이 무너지는 국면에 빠져 있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를 휩쓰는 40년 만의 물가상승 여파다. 일본 물가는 23개월 연속 치솟고 있다. 이 기간 최근 11개월 연속 3% 이상의 상승률을 이어왔다. 물가목표치 2%를 훌쩍 넘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물가상승 대책으로도 출구가 안 보인다”고 짚을 만큼 심각하다.

‘제로금리 족쇄 풀기 위한 정책’ 시각도

기시다 총리의 이번 대책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의 소득배증 정책을 연상시킨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기사회생한 일본 경제는 1960년대 소득배증 정책에 나선다. 전 국민을 중산층으로 만들자는 슬로건 아래 일본은 수출과 기업 성장으로 벌어들인 돈이 가계로 흘러가도록 했다. 고도성장에 힘입어 일본은 이 기간 10년 만에 미국 대비 1인당 국민소득이 16%에서 39%로 상승했다. 이때부터 일본인은 깃발을 들고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렸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그로부터 30년가량 고도성장을 구가한 일본은 1990년을 정점으로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최근까지 ‘잃어버린 30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임금은 사실상 30년간 동결됐고 경제 규모도 4조5000억 달러 주변에서 제자리걸음해왔다. 그 사이 중국 경제는 2010년 일본 경제를 추월한 뒤 지금은 일본의 3배가 넘는 18조 달러에 육박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져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이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었고 그 뒤를 이은 고금리 충격이다.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를 벌떡 일어나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세계적 고금리 충격이 일본 경제에 전기충격을 가한 것처럼 변화의 계기를 만들었다.

기시다 총리는 이케타 전 총리가 1957년 결성한 자민당 내 핵심 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의 현 회장이다. 1960년대 이케다의 소득배증 정책에 이은 기시다의 임금 인상 정책은 우연이 아니라 같은 맥락에 있는 셈이다. 일본은 디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제로금리 기조가 글로벌 금리 인상과 충돌하면서 극심한 엔저(低)와 물가상승에 직면하고 있다. 기시다의 승부수는 이 같은 제로금리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일본은행은 지난 4월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취임한 직후 10년물 국채의 금리 허용 폭을 0.75%까지 확대했다. 2%대 물가가 지속된다면 단기금리의 제로금리 해제도 가시권에 들 수 있다는 것이 국제금융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물론 제로금리 체제에서 과도한 재정 지출로 급격히 불어난 국가부채가 걸림돌이다. 일본은 국채를 찍어 확장적 재정정책을 펴오는 바람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가 224%에 달한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값이 급락하고 일본 정부의 이자 부담도 늘어난다. 일본 국채를 보유한 일본 국민은 채권값 하락 손실을 떠앉게 된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는 기회를 잡은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반도체·배터리 생산 확대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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