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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시가행진 보려 춘천서 왔다"…"비도 오는데, 길 왜 다 막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26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시민들이 군 전차와 장갑차 등의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이날 행진이 진행된 숭례문~광화문 구간 도로는 2시간여 동안 양방향 모두 통제됐다. 연합뉴스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26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시민들이 군 전차와 장갑차 등의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이날 행진이 진행된 숭례문~광화문 구간 도로는 2시간여 동안 양방향 모두 통제됐다. 연합뉴스

“군인들 줄 서 있고 탱크도 같이 있으니까 사진 찍으면 너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오늘 누구도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26일 오후 2시쯤 서울 동작구 사당역 3번 출구 앞, 채영란(75·여)씨가 삼각대 위에 올려 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말했다. 채씨의 카메라 렌즈는 바로 앞 도로를 향하고 있었다. 평소 차량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이날은 일반 차량 대신 전차와 박격포 등이 텅 빈 도로 위를 채우고 있었다. 전차 위에 탄 군인들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도로 양쪽에 서서 손을 흔드는 시민들을 향해 경례를 하거나 엄지를 들어 보였다.

26일 오후 2시쯤 사당역 3번출구 앞에서 채영란(75)씨가 국군의날 행사를 기다리며 사진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작가라고 소개한 채씨는 ″군인들과 탱크가 행진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서 병원에 가기 전에 나왔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26일 오후 2시쯤 사당역 3번출구 앞에서 채영란(75)씨가 국군의날 행사를 기다리며 사진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작가라고 소개한 채씨는 ″군인들과 탱크가 행진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서 병원에 가기 전에 나왔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건군 75주년 국군의날 행사가 열린 이날 서울 도심에서 군 병력 약 4600명과 전차ㆍ미사일 등 군의 첨단 무기가 대거 참가하는 시가행진이 열렸다. 2013년 이후 10년 만이다. 오전에 성남 서울공항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 병력 수송 버스와 기갑부대는 헌릉로와 양재대로·한강대로 등을 거쳐 광화문과 숭례문 일대로 이동했다. 시내 주요 역에선 전차나 미사일 등의 등장에 맞춰 구경 나온 시민들이 수십명씩 무리 지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거나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신용산역 인근에서 군 행렬을 구경하던 김민숙(65)씨는 “이걸 보려고 딸이랑 손자를 데리고 춘천에서 기차 타고 왔다. 남편도 군인 출신이고 아들도 지금 공군 대위다. 언제 이런 걸 볼 수 있겠나. 행진도 너무 재밌고 대한민국 군인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아이를 안고 군 수송 차량을 구경하던 박수영(34)씨도 “아이가 이제 21개월인데 차를 좋아하고 집도 근처라 구경하러 나왔다. 비도 오고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75주년 기념행사라고 하니까 드문 기회인 것 같다”며 웃었다.

26일 오후 2시쯤 신용산역 인근에서 국군의날 행사를 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장서윤 기자

26일 오후 2시쯤 신용산역 인근에서 국군의날 행사를 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장서윤 기자

“버스도 안 다니고 보행도 막아” 일부 시민들 분통

그러나 교통 통제와 소음 등으로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도 많았다. 서울시와 서울경찰청은 행진 구간인 숭례문~광화문 일대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양방향 통제했다. 군 장비 행렬이 지나는 헌릉로와 동작대로 등 시내 주요도로 역시 통행을 막았다. 해당 구간은 일반 차량뿐 아니라 대중교통 역시 최근접 지하철역까지만 운행 후 우회하도록 했다.

광화문 인근에 사무실을 둔 스타트업 회사의 직원 A씨는 이날 오후 투자자 모집을 위한 설명회를 준비했지만, 시가행진으로 큰 소음이 발생해 설명회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회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기회였는데 살리지 못했다. 평일에 도심 한복판에서 반드시 행사를 해야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에선 한 배달원이 통행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음식을 손에 든 채 한참 동안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고민하다 결국 시청광장을 크게 우회해 배달에 나섰다. 다른 배달원들도 길을 막아선 군인에게 “어디까지 통제된 거냐”고 물었고, “일대가 전부 통제됐다”는 대답을 듣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교통 통제 시간을 사전에 알지 못한 채 버스를 타려고 나선 시민들도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신용산역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최지원(30)씨는 “버스 타고 직장에 가야 한다. 앱에 2분 후 도착한다고 떴었는데 5분 넘게 지나도 안 온다. 잠시 후 도착이라던 안내 문구도 사라졌다. 지하철로는 바로 갈 수가 없어서 한참 걸어야 할 것 같다. 차량 통제 얘기를 듣긴 했는데 언제부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앱을 믿고 왔는데,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일부 구간은 예정보다 통제가 길어져 시민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 장을 보러 왔다 귀가하려던 김모(70)씨는 “뉴스에서 오후 3시까지 통제한다던데 지금 4시까지도 버스가 안 다닌다. 집에 갈 수가 없다. 무릎도 안 좋은데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려니 큰일”이라고 말했다. 인근에 있던 홍모(70)씨 역시 “택시도 안 오고 걸어가려고 해도 다 막아놔서 갈 수가 없다”며 “비도 많이 오는데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버스로 2900원이면 갈 걸 택시비로 3만원을 써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수천 명이 모여든 광화문과 시청역 인근에서도 혼란이 빚어졌다. 단체 사진을 찍으며 행사를 즐기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보행조차 통제된 일부 구간에선 화가 난 시민들이 경찰 등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 중년 남성은 “구경하러 왔는데 왜 걸어가는 것도 다 막냐, 이게 말이 되냐 정말 너무한다. 정말 성질나네”라며 길을 막아선 경찰에게 항의했다.

군 장병들과 장비들이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통제된 도로 양쪽으로는 시민 수천여명이 몰렸다. 시민들은 행진을 구경하며 환호를 보내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일부 시민들은 대중교통 뿐 아니라 보행까지 막아서자 분통을 터트렸다. 연합뉴스

군 장병들과 장비들이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통제된 도로 양쪽으로는 시민 수천여명이 몰렸다. 시민들은 행진을 구경하며 환호를 보내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일부 시민들은 대중교통 뿐 아니라 보행까지 막아서자 분통을 터트렸다. 연합뉴스

시청역 인근에서 한참 서성이던 한 직장인은 “길 건너 사무실에 가야 하는데 갈 방법이 전혀 없다. 횡단보도도 못 건넌다고 하는데 최소한 안내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외국인 관광객들은 또 얼마나 놀라고 불편하겠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39)씨는 “관심 없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여기서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군 훈련장 같은 데서 하고 중계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한편 계속된 비로 전투기 비행 등 일부 순서는 취소되거나 축소됐지만, 나머지 행진은 시간에 맞춰 진행됐고, 오후 5시쯤부터 차례로 광화문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광화문광장 옆 도로도 오후 5시 30분쯤부터 통행이 재개됐다. 다만 행진을 마친 군 병력과 기갑 장비 부대가 해산을 위해 집결하는 효자로·청와대로·삼청로 인근은 27일 오전 6시까지 순차적으로 교통통제가 해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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