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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운전기사 짜고 훔쳤다…55억 김환기 '산울림' 실종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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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작품을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생전 모습. 사진 중앙포토

작업실에서 작품을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생전 모습. 사진 중앙포토

국내 한 대학 교수가 생전 도난 당한 고(故) 김환기 화백의 작품 ‘산울림’(10-V- #314)이 4년 넘게 행방불명 상태다. 경찰 등 수사기관이 그림의 행방을 추적 중이지만 실마리를 찾고 있지 못한 데다, 도난 당한 그림을 구입한 이들 역시 “장물인지 몰랐다” “그림이 어딨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김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해당 작품의 감정가는 55억원에 달한다.

‘산울림 행방불명 사건’은 2018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산울림을 40년 넘게 소장한 70대 박모 교수는 암 투병 중이었다. 이 틈을 타 제자 김모(66)씨는 박 교수의 운전기사·가사도우미와 공모해 산울림을 포함해 감정가 총 109억2200만원에 달하는 작품 8점을 박 교수의 집에서 훔쳤다. 박 교수는 같은 해 12월 사망했다.

김씨의 범행은 유족들이 박 교수의 상속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2019년 4월 유족들은 작품이 보관된 방을 정리하면서 상당수 그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산울림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산울림은 박 교수가 1970년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김 화백에게서 직접 산 작품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박 교수는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던 김 화백의 그림을 사는 식으로 지원했다.

두 달 넘게 그림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유족들은 미술 시장에 “산울림(10-V- #314)을 사겠다”는 소문을 냈다. 그러자 50억여원에 그림을 팔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강남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70대 조모씨였다. 유족은 조씨와 2019년 6월 7일 그림을 매매하는 절차인 ‘뷰잉’(Viewing)을 하기로 했다. 뷰잉 장소인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씨와 만나 작품을 확인해보니 집에서 매일 같이 보던 산울림이 맞았다. 작품 뒷면에 적힌 작품명도 일치했다.

현장에선 유족과 조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유족이 작품의 출처를 캐묻자 조씨는 2019년 5월 제자 김모씨의 아내 계좌에 39억5000만원을 입금해 그림 매수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계약은 조씨과 10년 이상 거래를 해온 미술품 딜러 권모씨의 중개로 이뤄졌다.

“그림이 도난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유족은 그 자리에서 그림 회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조씨가 산울림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했다는 증거가 없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씨에게 그림을 판매한 김씨는 특수절도 혐의로 2021년 10월 서울고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1986년 환기재단이 박모 교수에게 김환기 회고전을 위한 찬조출품을 부탁한 편지. 사진 유족 제공

1986년 환기재단이 박모 교수에게 김환기 회고전을 위한 찬조출품을 부탁한 편지. 사진 유족 제공

산울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당시가 마지막이다. 조씨는 2019년 5월 그림을 구매한 직후 그림 지분을 셋으로 쪼개  A자산운용, B철강, C인베스트먼트에 45억원에 그림을 매도했다. 그림 실물은 유족들과 실랑이를 벌인지 12일이 지난 2019년 6월 19일 A자산운용에 넘겼다.

박 교수 유족들은 “장물인 사실을 알고도 그림을 샀고, 다른 이에게 판매했다”며 조씨를 장물 취득·양도·알선 등 혐의로 서울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 그림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유체동산 점유이전 및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도 했다. 법원은 8월 유족의 가처분을 신청을 인용했다. 하지만 법원 집행관이 조씨의 화랑을 방문했을 땐 이미 그림이 사라진 뒤였다. 집행 불능 조서에는 “조씨가 다른 곳에 작품을 팔아 집행이 불가능했다”는 기록만 남았다.

경찰은 조씨가 김씨로부터 그림을 살 때 장물인 사실을 알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판단해 장물 취득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다만 조씨가 6월 7일 유족들과 만나 장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약 2주 뒤인 19일 그림을 넘긴 만큼 장물 양도 혐의가 있다고 보고 검찰에 송치했다. 또 그해 12월 조씨가 B철강과 C인베스트먼트로부터 그림 지분 20/45를 재매수한 사실을 확인해 일부 장물 취득 혐의도 적용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경찰 수사에 반발 중이다. 조씨가 처음 그림을 살때 장물인 사실을 알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결론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다. 이에 유족들은 지난해 2월 경찰에 이의신청을 했고, 3월 검찰은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지난해 12월 경찰은 그럼에도 같은 결론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지만, 서울중앙지검은 5월 “조씨와 그림의 행방에 대해 다시 조사하라”며 경찰에 재차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그림의 행방도 함께 추적 중이지만 성과가 없는 상태다.

서울 강남경찰서 전경. 사진 연합뉴스

서울 강남경찰서 전경. 사진 연합뉴스

조씨가 그림을 살 때 장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그림 소유권을 놓고 다투는 민사소송에서도 쟁점이 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는 박 교수 유족 측이 그림 인도 청구를 제기함에 따라 그림의 소유권에 대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유족 측은 자신들이 원 소유주인 만큼, 그림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조씨는 도난 당한 장물인지 모른 채 작품을 산 만큼, 그림 소유권을 넘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법에선 진정한 소유자가 아닌 자에게 물건을 샀더라도 그 사실을 몰랐다면 취득자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조씨는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박 교수가) 누군지도 몰랐고 소유자가 누군지도 몰랐다”며 “정당한 돈을 주고 (그림을) 샀고 경찰·법정에서 다 진술했는데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첫 계약에 대해선 “미술품 딜러인 권씨를 믿고 거래한 것”이라며 “구매 시 소유주 등 그림의 배경을 묻지 않는 것이 업계의 예의”라고 주장했다. 그림의 행방에 대해선 “재판 중이기 때문에 함구하겠다”고 했다.

권씨는 “(산울림 거래 당시) 박 교수의 사망 사실을 몰랐고, 김씨가 박 교수의 대리인 자격으로 물건을 거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씨를 대리인으로 생각했다”며 “대리인을 믿고 딜을 진행하는 게 업계 관례”라고 했다.

조씨가 2019년 실물 그림을 넘긴 것으로 알려진 A자산운용 측도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그림 행방에 관해선 “모른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A자산운용 대표는 25일 중앙일보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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