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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제일 가고싶어요" 뇌종양 12살 민수의 소망 [소아암 희망된 기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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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학교가 제일 가고 싶어요. 졸업 사진도 못 찍고….”
초등학교 6학년 민수(12·가명)는 친구들이 그립다고 했다. 애들이 요즘 뭐 하는지 수시로 전화를 하지만, 아픈 뒤 함께 학교도 합기도 도장도 다닐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민수는 머리카락을 모두 밀었다. 민수는 뇌종양과 싸우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만난 민수의 엄마는 “워낙 학교 생활을 즐겁게 잘했던 아이라 학교 못 가는 걸 가장 아쉬워한다”고 말한다.

민수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난 건 올 3월. 두통·구역질 증상이 생겨 새학기 스트레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잘 낫지 않았다. 집 근처 제주대병원에서 검사했더니 머리에 큰 종양이 보인다며 서울대병원을 권했다. 그 길로 짐을 싸 서울로 왔고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이후 모자는 제주에 가지 못했다. 아빠는 동생과 제주에 살고 있다. 민수 엄마는 “항암 치료를 6차례 했는데 종양 크기가 줄지 않아 수술하기로 했다. 길어야 6개월 정도로 예상했는데 치료가 얼마나 더 길어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술 후유증도 무섭고 치료가 끝난 뒤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한 해 약 1000명 소아암 걸려 

지난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백혈병을 앓는 아이와 엄마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백혈병을 앓는 아이와 엄마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한 해 1000명 가까운 아이들이 암 진단을 받고 병과 싸우고 있다. 소아암은 아이들의 사망원인 1위에 올라있다. 통계청이 21일 공개한 2022년 사망원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0~19세 1745명이 숨졌다. 인구 10만명당 1~9세 사망률은 11.3명으로 2021년(8.0명)보다 크게 늘었다. 1~9세 사망원인 1위는 암이다. 2018~2020년 연평균 956명의 소아·청소년(만14세 이하)이 암에 걸렸다. 의료계에서는 이들을 소아암 환자로 분류한다. 소아암은 2020년 백혈병(319명)이 가장 많았고, 림프종(155명), 뇌 및 중추신경계 종양(105명) 순으로 발병했다. 뇌암은 10대의 목숨을 가장 많이 앗아간 질병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8815명의 소아와 청소년들이 암과 싸우고 있다.

어른에게도 무시무시한 암은 아이들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2020년 4명이 폐암에 걸렸고, 췌장암 12명, 간암 13명을 기록했다. 뼈에 생기는 골육종에도 29명이 걸렸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교수는 “소아암은 성인암과 달리 원인을 잘 모르고 증상도 특이한 게 별로 없어 빨리 알아차리기 어렵다. 구토·복통·발열 등의 증상이 있으면 장염이나 감기로 오인한다”며 “그래서 한 두달 지나서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성인보다 증식 속도가 빨라 병기가 높은 상태로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소아암이 무서운 이유다.

소아암이 9세 이하 사망원인 1위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플랫폼인 '플레이그라운드AI'를 통해 '소아암에 걸린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을 표현했다.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플랫폼인 '플레이그라운드AI'를 통해 '소아암에 걸린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을 표현했다.

백혈병은 5년 상대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피지훈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는 “백혈병 치료율은 75~80%까지 본다. 그러나 이런 혈액암 말고 뇌종양처럼 장기 덩어리에 생기는 고형암은 생존율이 60~70%로 떨어진다”고 말했다. 고형암 환아의 3분의 1 정도가 숨진다는 얘기다. 특히 고형암의 40%를 차지하는 뇌종양 치료가 까다롭다고 한다.

2~3년의 치료 기간에 드는 비용도 소아암 환자 가족에겐 큰 부담이다. 중간중간에 ‘미세 잔존암 검사’를 하며 강한 항암제를 써서 치료 효율성을 높이고 기간을 단축하는데, 검사비가 회당 80만~88만원(환자 부담 37만원)이다. 딸(11)이 백혈병 치료 중인 김모(46·여)씨는 지난 3월 전북 전주시에서 올라와 서울대병원 근처에서 기거하며 딸을 치료하며 빠듯한 살림을 하고 있다. 김씨는 “월세 100만원에 비급여인 약값, 멸균식 먹거리와 소모품 등 생활비로만 200만~300만원을 쓴다. 두 집 살림을 해야해서 더 팍팍하다”고 했다.

이건희 기부금으로 소아 잔존암 검사비 지원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뇌종양 환아와 엄마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뇌종양 환아와 엄마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현동 기자

김씨의 이중고를 그나마 덜어 준 것은 미세 잔존암 검사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 비용은 이건희 전 삼성회장 측이 2021년 5월 기부한 3000억원에서 나온다. 의료계에 조용히 스며든 기부금이 소아암과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과 극복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액의 기부금 덕분에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기반 유전체 검사도 가능해졌다. 전체 유전자를 훑어서 원인 유전자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고위험 여부도 가려내 거기에 맞게 치료법을 설계한다. 유전체 검사는 61명, 미세 잔존암 검사는 346명이 기부금의 지원을 받았다.

강형진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혈액종양) 교수는 “전체 유전체 검사를 통해 위험군을 나눌 수 있고, 미세 잔존암 검사로 항암제를 세게 쓸지 약하게 쓸지 치료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며 “치료 성적이 더 좋아지고 부작용 없는 정밀 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홍회 한국혈우재단 원장은 “재발 가능성 있는 환자를 확실히 치료해 소아 백혈병 완치율을 95%까지 끌어올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소아암 난제 해결의 마중물 된 기부금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소아암 환자들이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소아암 환자들이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기부금은 또다른 난제 해결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백혈병 치료법 통일 작업이다. 전국 소아암 치료 교수는 69명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의사도 적고, 치료법도 달라 서울 원정치료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소아암 치료에 투입된 기부금 덕분에 전국 소아암 교수 대부분이 머리를 맞대 표준 치료법 마련 작업을 시작했다.

한 해 몇 명 안 걸리는 소아 고형암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한다. 치료에 투자가 이뤄지면서 한 환자를 두고 다른 병원 의사 10여 명이 한몸처럼 움직이며 치료법을 궁리하는 게 가능해졌다. 피지훈 교수는 “현재 기술로 가능한 최선의 진단을 한 명이 아닌 여러 분야 의사들이 모여 확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최선의 치료를 추천한다”며 “그간 소아암에서 없던 맞춤 치료를 실현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 교수는 “뇌종양 환아의 인지기능 검사에 환자당 많게는 백만원이 든다. 환자 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건희 프로젝트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일”이라며 “데이터가 쌓이면 방사선 치료 후 교육에 대한 지침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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