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인 듯 그림인 듯…황규태의 실험 6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황규태 사진작가는 구상 이미지를 극한으로 확대하면서 픽셀이 만들어내는 추상의 세계에 진입했다. ‘픽셀 비트의 제전’, 280x650㎝.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황규태 사진작가는 구상 이미지를 극한으로 확대하면서 픽셀이 만들어내는 추상의 세계에 진입했다. ‘픽셀 비트의 제전’, 280x650㎝.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눈에 익숙해 보이는 동시에 새롭다. 대담하게 대비되는 색상, 독특하게 반복되는 패턴의 이미지가 시선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면서 두 번 놀란다. 추상 회화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진이라는 점에 놀라고, 이 작업을 한 작가가 85세라는 점에 다시 놀란다.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 황규태 얘기다.

지난 60년간 실험 사진의 최전선에서 달려온 그가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황규태 다양다색 60년’이란 제목으로 개인전(10월 8일까지)을 열고 있다. 지난 1~3월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황규태, 사진에 반-하다’ 전시에 이어 그의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올해 두 번째 대규모 전시다. 과거에 그는 ‘문제적 작가’라 불렸지만, 최근 사진계에선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사진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8년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신의 작품 ‘녹아내리는 태양’ 앞에 선 황규태 작가.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2018년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신의 작품 ‘녹아내리는 태양’ 앞에 선 황규태 작가.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전시는 1990년대부터 작업해온 ‘픽셀’ 시리즈로 먼저 관람객을 맞고, 이어 그의 1960년대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부터 ‘블로우업’ ‘포토몽타주’ ‘버노그라피’ 등의 대표 연작을 함께 소개한다. 화면의 특정 부분을 확대하고, 이미지를 오리거나 겹쳐 합성하고, 필름을 태우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온 궤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동국대 정치학과를 나온 그는 1963년 경향신문 사진부 기자로 활동하며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5년 도미한 그는 컬러 현상소에서 암실기사로 일하면서 실험을 이어갔다. 필름을 태워 나타나는 왜곡된 이미지를 인화한 버노그래피(Burnography) 시리즈도 이때 선보였다. ‘녹아내리는 태양’ ‘불타는 도시’와 같은 초현실적 이미지의 작품이 그렇게 나왔다.

또 다른 대표작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블로우 업’ 시리즈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촬영한 흑백사진의 이미지를 스캔해 디지털 소프트웨어로 일부만 확대한 작업으로, 이재구 고은사진미술관장에 따르면 “사진의 추상적 가치를 위해 시도한 파격”이었다.

‘픽셀 RGB & 리버스’, 79.5x297㎝.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픽셀 RGB & 리버스’, 79.5x297㎝.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디지털 기술로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에 눈을 뜨며 그의 실험은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다이버처럼 그는 컴퓨터 안에 저장된 사진의 이미지를 파고들었고, 그렇게 건져 올린 것으로 ‘픽셀(pixel)’ 시리즈를 선보였다. 우리말로 ‘화소’라 불리는 ‘픽셀’은 화면의 최소 단위를 뜻한다. 지난 21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난 그는 “1997년 TV 모니터를 루페(사진 작업용 확대경)로 우연히 들여다봤더니 픽셀이 보였다. 그걸 촬영해 확대했더니 상상하지 못한 색과 무늬가 보이더라. 내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가로 6.5m, 세로 2.8m 규모의 작품 ‘픽셀 비트(bit)의 제전’(2018)은 픽셀 시리즈에서 그가 도달한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각 네모 패턴이 어울려 보여주는 다채로운 선과 색채의 조화가 마치 시각적으로 펼쳐진 한 편의 음악을 연상케 한다. 사진과 회화, 그래픽의 경계를 허물고 그 위에서 ‘노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의 픽셀 시리즈에 대해 손영실 경일대 영상학부 교수는  “칸딘스키가 순수 추상을 통해 조형에 대한 탐구에 전념했듯이, 사진가로 출발한 황규태는 색과 형태의 해방을 꿈꾸며 픽처를 만들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시도가 처음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1970년대부터 그의 작품은 해외 사진잡지 ‘35㎜ 포토그래피’와 ‘파퓰러 포토그래피’ 등의 표지를 장식하며 주목받았지만, 한 편엔 “이것은 사진이 아니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새 시리즈를 발표하고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까지는 최소 10~20년은 걸린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작업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산에 이어 천안에서 개인전이 연속해 열리는 동안 황씨는 자신의 전시장을 찾지 못했다. 척주관협착때문에 서울 밖 여행을 잠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만나는 픽셀 이미지에 홀려 하루 10시간 이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더니 이런 병을 얻었다. 그래도 최근 시술한 결과가 좋아 나아지고 있다”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하는 작업은 사진인가, 아닌가. 그는 “이게 사진이냐, 그림이냐를 따지는 건 이제 내 관심 밖”이라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사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