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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전시 자료에 "식민지배 합법" 새로 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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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01면

일본이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유네스코로부터 지적받은 ‘후속 조처’를 반영하면서 오히려 과거 식민지 지배는 합법이라는 주장을 새롭게 집어넣은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가 21일과 22일 방문한 일본 도쿄(東京)의 산업유산정보센터 자료실. 경비원들이 내부 촬영을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는 가운데 군함도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3구역’에 들어서자 가장 앞쪽에 TV모니터가 나타났다. 초기화면에는 ‘대일본제국의 통치와 전후처리’란 제목 아래 ▶한국병합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배상 및 전후처리 등 항목이 표기돼 있었다. 2020년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첫 문을 열 때는 없었던 것이다. 지난 20일 새롭게 내용을 보완하면서 생겨났다.

‘한국병합’ 부분을 치고 들어가니 나타난 문구는 이랬다. “1905년 이래 일본의 보호국이었던 대한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대일본제국의 일부로서 통치받았다. 일본은 1910년의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을 정식으로 병합했다.” 이어 “2001년 (일·한·미·영·독일 등의 연구자가 참가해) 개최된 ‘한국병합 재검토 국제회의’에서 국제법의 귄위자인 구미의 법학자로부터 일한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법관행에 비춰 ‘무효’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됐다”란 문장이 떴다. 인용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합법’을 교묘하게 강조했다. 바로 밑에는 ‘자료1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자료 2 각의 결정’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 등을 첨부했다. ‘배상 및 전후 처리’ 항목에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기타 관련 조약에 따라 성실하게 대응해 왔으며, 조약 당사국 간에는 법적으로 해결이 끝난 상태”라고 적시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민과 다른 국민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유네스코와 국제사회에 약속해 놓고 정작 전시장에는 과거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끌고 와 노역의 부당함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 측 당국자는 “일본이 유네스코의 권고를 일부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 내 보수층을 의식한) 일종의 방어책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변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 “조선인 강제노동·차별 없었다”…외교부 “전시 내용 보완되도록 협의”

군함도 관련 내용을 전시한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제 3구역’의 모습. 안쪽으로 보이는 모니터에 한일병합이 합법임을 강조한 자료들이 게재돼 있다. [사진 독자]

군함도 관련 내용을 전시한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제 3구역’의 모습. 안쪽으로 보이는 모니터에 한일병합이 합법임을 강조한 자료들이 게재돼 있다. [사진 독자]

심지어 새롭게 마련된 전시물 중 상당수는 “강제 노동이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기존에 있던 대만인 노동자의 월급 봉투 외에 1940년대 효고(兵庫)현 하리마 조선소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의 월급 봉투 전시가 추가됐다. 조선인에 대한 임금 체불과 차별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마쓰모토 사카에 ‘하시마 도민회’ 명예회장이 쓴 ‘한국 매스컴의 속과 겉’이란 자료에는 “(한국 매스컴의) 1943년부터 패전까지 일본인보다 조선인, 중국인의 사망률이 높다는 주장은 피해자의식 바로 그 자체”라고 적혀 있었다. 전시 해설자 역시 관람객들에게 “조선인이 군함도에 강제로 끌려와 차별을 당했다는 것은 한국의 억지 주장”이라고 말했다.

‘한일병합’의 적법성을 놓곤 한·일 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한일병합조약이 원천 무효이며 일제의 행위도 모두 불법이란 한국 정부와 달리 일본은 36년 간의 일제강점기는 ‘합법적 지배’라 주장한다. 조약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 시점부터 무효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일본 정부가 2015년 군함도를 포함한 23개 시설을 ‘메이지(明治)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며 만든 전시관이다. 등재 당시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2020년 문을 연 센터에는 관련 내용이 거의 없어 비판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고 2021년 유네스코가 “강력한 유감”을 표하며 시정을 요구하자 일본은 최근에야 전시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새롭게 보완된 전시물 중에는 한국의 눈높이에는 미흡하지만 나름 노력한 흔적들도 있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한·일 정상회담 후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힘들고 슬픈 일을 겪으신 데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힌 메시지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액자 옆엔 1943~1945년 사이 군함도에서 사망한 44명 중 조선인이 15명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모니터에 흐르고 있었다. 또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결정 회의에서 한국 대표가 “조선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주유네스코 일본대사가 정보 센터 개설을 약속했던 발언을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내용은 다소 보완됐지만 일본의 일방적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이 상당수라 이후에도 논란이 예상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유네스코가 일본에게 한국 등 관계국과 계속 대화하도록 한 만큼 전시 내용이 보완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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