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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홍일 장군, 불의와 타협 안 한 참군인…독립운동 정신 계승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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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13면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아들 김덕재 씨가 20일 서울 종로구 명동 한 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상선 기자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아들 김덕재 씨가 20일 서울 종로구 명동 한 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상선 기자

22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는 국가보훈부가 마련한 김홍일 장군(1898~1980)의 제4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김 장군은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의기투합해 이봉창·윤봉길 의거에 쓰인 폭탄을 제공했고, 광복 후 6·25 전쟁에서도 경기 시흥지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1주일간 방어해 국군의 괴멸 위기를 막아내는 업적을 세웠다. 추모제 참석차 방한한 김 장군의 셋째 아들 김덕재(88·사진·미국 거주)씨는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참군인이었다”며 고인의 정신을 기렸다.

장군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은.
“중국 상하이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모든 힘을 쏟느라 거의 집에 안 들어왔다. 한국에서 재회한 뒤인 1948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결혼 25주년인데 함께한 시간은 3년도 안 된다’며 미안하다고 할 정도였다. 상하이에서 아버지 없이 살던 시절 일본군은 사복 차림으로 위장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어머니한테 행패를 부리는 등 감시를 이어갔다. 아버지를 돕던 중국군이 상하이를 떠나야 한다며 나와 어머니에게 짐을 싸게 해서 피신해야 했다.”
김홍일 장군 추모제에서 묵념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오른쪽 둘째). [사진 국가보훈부]

김홍일 장군 추모제에서 묵념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오른쪽 둘째). [사진 국가보훈부]

자라면서 알게 된 장군의 성품은 어땠나.
“아버지는 ‘정대광명(正大光明) 애국애민(愛國愛民)’이라는 가훈을 항상 강조했다. ‘정직하고 밝은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본인 역시 그에 맞게 생활하면서 사치와 같은 사욕을 멀리했다. 6·25 전쟁 때 한 번은 부관이 집에 쌀가마니를 가져왔다. 우리 가족을 잘 챙기려고 그런 거였지만 아버지는 필요 없다며 부관을 혼내서 돌려보냈다. 광복 직전엔 일본군이 귀금속을 훔쳐 달아나는 걸 부산에서 잡은 일이 있었다. 노획한 귀금속을 동료 군인들이 하나씩 가지려고 하자 아버지는 안 된다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공과 사의 구분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김구 선생 등과 독립운동에 얽힌 일화는.
“김구 선생은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우리 가족을 챙겼다. 윤봉길 의거가 결정됐을 때, 아버지는 중국 공장에서 만든 폭탄을 가져와 윤봉길 의사에게 그 폭탄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고 (윤 의사를) 직접 훈련시켰다. 광복 후에도 김구 선생과는 뜻이 잘 맞았다.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졌을 때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함께 크게 실망했다. 북한이 왜 소련 말을 듣고 같은 민족과 싸우려 하느냐, 작은 나라가 어렵게 독립했는데 똘똘 뭉쳐야만 한다는 게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후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협치가 중요한데 한국은 정쟁이 너무 심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합심해서 기적을 일으켰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후손들이 잘 계승했으면 한다. 남북 평화 통일도 빨리 되면 좋겠다. 다만 북한은 문제가 많은 독재 정권이다. 국부(國富)를 거기에 퍼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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