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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한국 후려친 중국의 첨단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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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중국 화웨이가 자체 모바일 프로세서(AP)를 내놓자 미국의 반응이 날카롭다. 중국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SMIC가 생산해 화웨이 메이트60 프로에 탑재한 기린9000s는 7나노미터(nm, 10억분의 1m) 공정으로 생산된 칩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14나노 이상 칩 기술을 철저히 통제해 왔지만 중국이 독자적 기술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의미다.

미국은 2018년부터 중국의 첨단 기술 도약을 막아 왔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군에 통신장비를 제공하는 화웨이의 숨통부터 조이고 나섰다. 2018년 12월 1일 화웨이가 미국의 이란 제재를 어겼다면서 때마침 캐나다에 머물고 있던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의 딸 멍완저우 부회장을 억류했다. 그는 억류 1028일 만에야 중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7나노 칩 확보’ 평가절하 섣불러
중국의 반도체 자립 가능성 봐야
‘대륙의 실수’라며 얕보는 게 실수

지난 5년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메이트60 프로에서 7나노 칩을 찾아낸 테크인사이츠의 허치슨 부회장은 “중국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없이도 기술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도약을 얕잡아 보지 말라는 뉘앙스다.

미국 정부는 이런 평가를 외면한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화웨이와 관련해 “7나노 양산 능력의 증거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중국의 기술 진보는 이미 세상의 판을 뒤집고 있다. 당장 애플은 아이폰15를 출시하면서 가격을 동결했고, 화웨이에 대량으로 칩셋을 공급하던 퀄컴은 매출 감소에 비상이 걸렸다.

문제는 이런 국면을 지켜보는 우리의 자세다. 강 건너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메이트60 프로에 대해 ‘삼성전자는 2나노로 가고 있고 중국은 EUV가 없어서 멀리 못 간다’는 평가절하가 대세다. 이런 평가는 ‘대륙의 실수’를 떠올린다. 2012년 무렵 중국이 스마트폰을 처음 출시하자 중국이 어쩌다 그럴싸한 짝퉁을 만들어냈느냐면서 한국에선 대륙의 실수라고 했다. 그렇게 조롱할수록 한국의 스마트폰은 밀려났다. 중국에서 갤럭시 점유율은 1% 아래다. ‘듣보잡’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성장한 중국 스마트폰은 국경을 넘어 인도와 아프리카 시장을 휘어잡고 있다.

이달 초 베를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중국 기업은 한국 기업의 뺨을 후려쳤다. 중국 기업의 디스플레이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폴더블 폰의 두께는 세계에서 가장 얇다고 뽐냈다. 같은 시기 국제 모터쇼에서도 중국 전기차들이 행사의 주인공이 됐다. 급기야 유럽연합(EU)은 지난 14일 중국 전기차에 대해 관세 전쟁을 선포했다. 중국의 기술과 가성비를 이길 수단은 무역장벽 쌓기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중국이 내수 침체를 겪고 있지만 기술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미국 역시 중국에 대한 규제를 한층 강화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은 첨단 제품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다는 ‘제조 2025 목표’에 이미 안착했다고 봐야 한다. 반도체 역시 자립 기반을 갖췄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밥을 먹듯 중국이 EUV보다 뒤떨어지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써서 7나노 칩을 만들었다고 해도 반도체 자립 기반을 확보한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7나노 기술이면 웬만한 범용 반도체 수요에는 대응할 수 있어 크게 아쉬울 게 없다.

중국이 반도체 기술을 파고든 것은 벌써 30년에 이른다. 그동안 중국 역대 총리 가운데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견학하지 않은 이가 드물다. 이제는 그런 견학 행렬이 끊긴 지 오래다. 중국이 최소한의 기술 생태계를 갖췄다는 방증이다. 그사이 한국의 입지는 좁아졌다. 일본이 반도체 생산에 다시 뛰어들고 인텔은 1.8나노 기술로 달리고 있다. 한국은 더 성능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기술은 늘 발전한다. 신발 끈을 다시 매고 초격차를 유지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