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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난동 보고도 현장 나온 경찰…법원, 직무유기 이례적 인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년 전 ‘인천 흉기난동 사건’ 당시 부실대응으로 해임된 경찰관들에 직무유기 혐의가 인정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경찰관의 현장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경찰청장(김창룡)이 사과와 함께 ‘비상대응 체제’ 전환을 선언하는 계기가 됐던 사건이다.

인천지법 형사17단독 이주영 판사는 21일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된 박모(49)전 경위와 김모(25) 전 순경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이들에게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형법 제122조에 따라 직무유기죄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다.

이 판사는 “박 전 경위는 빌라 밖에 있다가 비명을 듣고 (1층) 공동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뒤 계단을 올라가던 중 (내려오던) 김 전 순경으로부터 ‘사람이 칼에 찔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알지 못했더라도 범죄가 일어난 사실은 알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사는 “이후 (사건이 발생한 3층으로 올라가지 않은) 박 전 경위는 김 전 순경을 따라 빌라 밖으로 나온 뒤 다시 공동 현관문을 열고 범행 현장으로 가는 데 3분 넘게 걸렸다”며 “당시 (피의자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 피해자 측이 언론에 공개한 2021년 11월 15일 인천시 남동구 빌라의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보면 사건 당일 오후 5시4분쯤 가해자 이모(50)씨는 빌라 3층에서 A씨를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영상엔 이 장면을 목격하고도 김 전 순경이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후 빌라 밖에 있던 박 전 경위는 비명을 듣고 함께 있던 A씨 남편과 빌라 내부로 진입했다. A씨 남편과 박 전 경위는 계단을 내려오던 김 전 순경과 마주쳤다.

사건 당시 빌라 밖으로 나온 경찰관이 범행을 재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 피해자 A씨 측

사건 당시 빌라 밖으로 나온 경찰관이 범행을 재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 피해자 A씨 측

이때 A씨의 남편은 경찰관을 밀치고 곧장 뛰어 올라갔지만, 박 전 경위는 김 전 순경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박 전 경위는 빌라 1층 출입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고도 우물쭈물하다가 뒤로 물러섰다. 이때 김 전 순경은 박 전 경위에게 이씨가 A씨의 목에 흉기를 찌르는 장면을 2차례 재연했다.

경찰관들이 다시 현장에 진입한 건 건물을 나온 지 3분여 만인 오후 5시7분이다. 이들은 3분 40초 뒤인 5시 11분쯤 빌라에서 이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경찰 대응이 늦어지는 동안 A씨와 남편, 딸 등 일가족 3명은 이씨가 휘두른 흉기에 크게 다쳤다. A씨는 목을 찔려 의식을 잃은 뒤 뇌경색 수술을 받았고, 남편과 딸도 얼굴 등에 전치 3~5주의 상처를 입었다. 박 전 경위 등은 구호와 지원 요청을 위해 현장을 잠시 벗어났다고 해명했지만 검찰은 이들에게 직무유기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불구속 기소했다.

이 판사는 “박 전 경위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하나, 김 전 순경이 현장을 이탈할 당시 ‘칼에 찔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인지했음에도 현장을 이탈해 직무유기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된다”며 “피고인들은 경찰공무원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범죄를 진압했어야 했음에도 현장을 이탈하고 직무를 유기했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경찰관의 직무수행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국민의 신뢰를 저해했고, 박 전 경위는 상급자로서 그 죄책이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후 성실의무 위반 등으로 해임된 박 전 경위와 김 전 순경은 징계가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으나 지난 7월 패소했다. 이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22년형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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