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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밀착 러시아 '선' 넘었다…尹 향해 "거짓 프로파간다 말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한민국의 수장(head)이 북ㆍ러 협력을 깎아내리는 선전(propaganda) 캠페인에 동참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주한러시아대사관이 21일 오후 전날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겨냥해 "근거 없는 추측성 주장이자 거짓말"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주재국 국가 수반을 향해 대사관이 이같은 입장을 밝힌 건 심각한 외교 결례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공동취재단.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공동취재단. 뉴시스.

"선전 동참에 깊은 유감"

주한러시아대사관은 이날 페이스북 계정에 '제78차 유엔 총회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올리고 "대한민국의 수장이 북ㆍ러 협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미국이 시작하고 한ㆍ미 언론이 주창하는 선전(propaganda) 캠페인에 동참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밝힌다"며 "메가폰 외교에 의한 근거 없는 추측성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메가폰 외교'는 이성적 협의 대신 공개적인 비방을 통해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뜻한다.

대사관은 그러면서 "이는 도발적이고 적대적이며, 서방이 미국 주도로 러시아를 향해 집단적으로 벌이는 공세적인 하이브리드 전쟁과 맥을 같이 한다"고 지적했다. 또 윤 대통령의 연설을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의 악명 높은 거짓 유리병(vial)"에 비유하기도 했다. 2003년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하얀색 유리병을 들어 보였는데, 러시아는 미국이 제시하는 '거짓 증거'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자주 쓴다.

21일 주한러시아대사관이 전날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비판하며 올린 페이스북 입장.

21일 주한러시아대사관이 전날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비판하며 올린 페이스북 입장.

이어 주한러시아대사관은 "러시아는 좋은 이웃이자 오랜 파트너인 북한의 관계 발전과 관련된 사항을 비롯해 모든 국제적 의무를 항상 준수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 지도부가 정신을 차리고(sober) 객관적으로 현 상황을 파악해 행동하길 바라며,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반(反) 러시아 노선을 밟을 경우 한ㆍ러 양자 관계와 한반도에 미칠 부정적 결과를 고려하길 바란다"고 사실상 위협했다.

앞서 전날인 20일(현지시간) 윤 대통령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러 군사 거래는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 겨냥한 도발이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과 동맹, 우방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러시아 아무르주에 있는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러시아 아무르주에 있는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모습. 노동신문. 뉴스1.

초치 직후 반발도

최근 주한러시아대사관은 연이어 한국 정부에 대한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언행을 삼가지 않고 있다. 지난 19일 장호진 외교부 1차관은 안드레이 쿨릭 주한러시아대사를 북한과 군사 협력 등의 이유로 초치했는데, 바로 이튿날인 20일 주한러시아대사관은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올려 "한ㆍ미 언론이 과장되게 유포하는 추측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한국 파트너에게 정확히 밝혔다"며 반발했다. 대사가 초치된 직후 주재국 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는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당시 대사관은 또 "한반도는 물론 대한민국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은 한반도에서 한ㆍ미 양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억압하겠다는 목표로 벌이고 있는 맹렬하고 불균등한 군사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한국 측에 상기시키고자 한다"고도 주장했다.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임에도 불구하고 안보리 결의 위반에 해당하는 대북 군사 협력을 노골화해놓고,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느닷없이 한ㆍ미 연합훈련으로 돌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회담을 연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회담을 연 모습. 연합뉴스.

같은 날 주한러시아대사관은 유엔 안보리를 발목 잡는 러시아의 행태를 비난하는 국내 언론 기사에 대해서도 "유엔 안보리의 업무 목적과 원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다"며 "안보리 서방 대표의 비건설적 태도야말로 안보리의 노력을 마비시킨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처럼 주한러시아대사관이 연일 공세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이 다음 주 중 방한할 가능성도 외교가에서 나온다. 방한 시 북ㆍ러 정상회담 관련 정보도 공유할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정상에 대한 선 넘은 비난을 하면서도 고위급 교류는 예정대로 진행하는 전형적인 '양면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北 국방상 독자 제재

북ㆍ러가 무기 거래를 노골화하면서도 "국제 의무를 어긴 적 없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가운데, 정부는 이날 러시아를 비롯한 제3국과의 무기 거래 및 불법 금융 거래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개인 10명과 기관 2개에 대한 독자 제재에 나섰다. 제재 대상에 오른 북한의 고위 인사는 강순남 국방상, 박수일 전 총참모장, 이성학 국방과학원 당 책임비서 등이다. 특히 강 국방상은 최근 김정은의 방러 일정에 동행했다.

이날 정부의 독자 제재는 북ㆍ러 군사 협력을 견제하는 성격이 짙다. 같은 날 오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장 1차관은 "러시아가 북한에 대한 중요한 군사 협력을 했다는 물증이 확인될 경우에는 미국, 일본, 유엔, 서방이나 뜻을 같이하는 나라와 협력해서 제재를 공조할 수도 있고 독자 제재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ㆍ러 군사 협력을 근거로 북한뿐 아니라 러시아를 향해 독자 제재를 단행할 가능성도 열어둔 셈이다.

지난 7월 27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이른바 '전승절'(정전협정 기념일) 열병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리훙중(李鸿忠)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이 나란히 선 모습. 당시 강순남 국방상이 연설자로 한ㆍ미를 위협했다. 노동신문. 뉴스1.

지난 7월 27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이른바 '전승절'(정전협정 기념일) 열병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리훙중(李鸿忠)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이 나란히 선 모습. 당시 강순남 국방상이 연설자로 한ㆍ미를 위협했다. 노동신문. 뉴스1.

한편 이날 외통위에선 연내 개최가 추진되던 한ㆍ일ㆍ중 정상회의가 내년 초로 넘어갈 가능성도 제기됐다. 장 1차관은 이날 관련 질문에 "한ㆍ일ㆍ중 정상회의는 연내 또는 연초 정도에 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나라(중ㆍ일)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선 한ㆍ일ㆍ중 정상회의가 순조롭게 잘 진행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에 올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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