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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40년 만에 '피해자의 항거 곤란' 법리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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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대법원 제공]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대법원 제공]

강제추행죄가 인정되려면 필요했던 피해자의 ‘항거 곤란’ 요건이 사라진다.

형법상 강제추행(298조)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으로만 정의돼 있다. 1983년 대법원은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는 해석을 덧붙였고, 이는 40년 간 처벌의 요건으로 작용해 왔다.

대법원이 이 ‘정도’ 요건을 폐기하고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까지 요구되지 아니하고,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해악을 고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전원합의체 선고는 24일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선고다. 사진은 김 대법원장이 21일 선고를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는 모습. [대법원 제공]

이날 전원합의체 선고는 24일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선고다. 사진은 김 대법원장이 21일 선고를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는 모습. [대법원 제공]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날 선고에서 “‘강제’의 사전적 의미는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으로서, 반드시 상대방의 항거가 곤란할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다”며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강제추행죄는 1995년 형법 개정 이전 ‘정조에 관한 죄’였으나, 지금은 정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죄다.

대법원은 또 이미 최근 하급심 판결에서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판례변경의 근거로 삼았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 ‘항거 곤란’이란 기존 법리를 엄격히 따르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제 해석 기준을 명확히 해 사실상 변화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재판 실무와 판례 법리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혼란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앞으로는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을 폭행죄와 협박죄의 폭행·협박과 같은 의미로 쓰기로 했다.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죄의 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죄의 협박)하는 정도다.

대법원은 그동안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협박의 의미를 '가장 좁은 의미'로 봤던 40년 판례를 깨고, 앞으로는 폭행죄·협박죄 수준의 '좁은 의미'로 보기로 했다. 신재민 기자

대법원은 그동안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협박의 의미를 '가장 좁은 의미'로 봤던 40년 판례를 깨고, 앞으로는 폭행죄·협박죄 수준의 '좁은 의미'로 보기로 했다. 신재민 기자

대법원 관계자는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라며, 최근 일본에서 도입하려는 ‘비동의 추행죄’처럼 넓은 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손동권 건국대 명예교수는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 만으로 이미 충분히 좁은 의미”라면서 “불법적인 유형력에서의 불법이 무엇인지를 두고 다툴 여지는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로스쿨 홍영기 교수는 “그간 기습추행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강제추행죄에는 ‘가장 좁은 의미’의 폭행‧협박이 필요하다고 봤는데, 최근 들어 그렇지 않은 판결들이 나오면서 전원합의체에서도 이러한 ‘최협의’ 기준을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추행은 폭행이면서 동시에 추행인 ‘기습 추행형’과, 폭행 또는 협박 이후에 벌어지는 ‘폭행·협박 선행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날 변경한 건 후자에 대한 것이다. 기습추행에 대해선 이날 쟁점이 아니어서, 1983년 판례(‘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의 것임을 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를 유지한다.

성범죄 전담부에서 근무한 적 있는 한 고등법원 판사는 “그간 기습추행은 의사에 반한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하고 기습추행이 아닌 경우엔 유형력이 더 강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어 균형이 안 맞게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모두 기습추행과 비슷하게 맞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5살에게 “만져줘” 강제추행 무죄, 40년 판례 바꾼 계기 됐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5년 전 고등군사법원에서 강제추행 무죄를 선고했던 건에 대한 것이다. 사촌동생에게 “내 것 좀 만져줄 수 있느냐”며 손을 잡아 성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피해자가 거부하며 일어났으나 “한 번만 안아줄 수 있느냐”며 피해자를 침대에 쓰러뜨린 뒤 올라타 가슴 등을 만졌다는 사건이다. 고등군사법원은 “만져줄 수 있느냐” “안아줄 수 있느냐” 같은 말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며 성폭력처벌법상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죄는 아니라고 했다. 다만, 피해자가 15살이었기 때문에 아동청소년법 상 위력추행죄로 보고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이날 대법원은 이를 깨고, 강제추행죄를 인정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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