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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김정은 5박 6일 러시아 방문 손익계산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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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2020년 12월 2일. 한·미 정보 당국자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목했다. 영화 ‘공작’에서 ‘흑금성’(박채서)의 파트너이자 북한 대외경제위 처장으로 나왔던 이명운의 실제 인물인 이호남(70대 초반) 국무위원회 고문이 나타나서다. 정찰총국 출신인 그는 54세의 G씨를 데리고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북한이 국경을 폐쇄하며 인적 왕래가 불가능했던 때다. 김 위원장의 비준(재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남북 접촉 창구 역할을 했던 이호남은 이듬해 4월 20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며 “이번에 들어가면 은퇴할 것 같다”며 G씨를 소개하고 인수인계했다. 그러나 정보 당국은 그의 러시아 방문 목적을 포스트 코로나에 대비해 북한이 대외 접촉 거점을 이동하기 위한 사전작업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북한이 그동안 중국의 베이징이나 선양, 단둥에서 진행하던 ‘외부인’ 접촉 무대를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러시아 다가서기가 하루 아침의 결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북미 협상 막히자 러시아행
첨단군사시설 ‘족집게 과외’
전시 러 활용해 제재 무력화
중국과는 일단 거리두기 태세

외톨이 외교, 득인가 실인가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오른쪽)과 태평양함 대사령부 관계자들이 지난 16일 부대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이들 왼쪽 뒷편에 정차해 있는 승합차 전면에 부착된 현대자동차 엠블럼이 눈에 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오른쪽)과 태평양함 대사령부 관계자들이 지난 16일 부대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이들 왼쪽 뒷편에 정차해 있는 승합차 전면에 부착된 현대자동차 엠블럼이 눈에 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3년여 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이 러시아 땅을 밟았다. 러시아와 전략적으로 협력하고,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게 북한 자체의 평가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전과 후 네 차례나 시진핑 주석을 만나 상의하는 등 김 위원장에게 중국은 든든한  뒷배였다. 그런 중국 대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된 러시아에 김 위원장이 손을 내민 건 의외다. 북한이 관심을 끌었을지 몰라도 집중 감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김 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여러 면에서 궁금증을 낳는다.

북한의 의도는 뭘까. 김 위원장은 러시아의 위성과 미사일 개발의 상징인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4시간여 푸틴 대통령을 만난 뒤 김 위원장은 콤소몰스크나아무레로 이동해 유리 가가린 전투기 공장을, 크네비치군비행장에선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함께 항공우주군 장비를 살펴봤다. 추르킨 지역의 해군부대와 태평양함대를 찾아 대잠호위함에 올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러시아의 후속 기술 지원 여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다음달 정찰 위성 발사를 공언하고, 핵잠수함 개발에 나서겠다는 김 위원장과 북한 인사들에게 러시아의 군사시설 참관 자체가 족집게 과외인 건 분명하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결정적 순간마다 러시아 찾는 북한

북한 지도자는 건국 이후 절박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러시아(옛 소련 포함)를 찾았다. 1949년 2월 김일성 주석(당시 내각 수상)이 선물을 잔뜩 싸들고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을 찾은 게 대표적이다. 김 주석은 스탈린과 남침을 상의하고 차관과 전쟁 물자 지원을 약속하는 ‘조(북)·소 양국간 경제적 및 군사적 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6·25전쟁을 석 달여 앞두고도 급히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전쟁이 끝난 53년 9월엔 전후복구를 위해 손을 벌렸다. 이번을 포함해 17차례의 북·러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에겐 매번 ‘결정적’ 순간이었다. 김 위원장 역시 무기 현대화의 마지막 퍼즐 맞추기에 러시아 카드를 꺼냈다.

자립을 강조하는 북한이지만 대북제재와 3년 6개월 넘게 셀프 봉쇄에 따른 경제난의 돌파구도 필요했다. 연해주 주지사를 만나 농업 및 관광과 관련한 협의를 한 게 이를 보여준다. 북한은 이번에 러시아의 식량 지원 제의를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대신 개점 휴업 상태인 북·러경제위원회의 재가동을 통해 북한 인력을 대규모로 수출하거나 러시아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간접 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남아있다. 북한이 연해주 지역에서 직접 밀을 재배해 들여오는 방안도 예상된다.

러 활용 대북제재 판깨기?

북·러 정상의 협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향후 어떤 협력을 하더라도 대북제재에 저촉될 가능성이 크다. 서방 국가들은 양국의 무기거래를 경계하고 있다. 북한과 군사협력을 중단하라는 지난 19일 한국 정부의 요구에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북·러 무기거래는 근거 없는 추측”이라며 일축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군사협력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 위원장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대북제재 해제를 주문했다. 그만큼 북한에게 대북제재 해제는 절박하다. 미국과 거래가 불발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들이 찬성표를 던졌던 대북제재 완화를 유엔 안보리에 공식 요구했다. 이후엔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쏴도 북한편을 들고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78차 유엔 총회 연설에서 기능 부전에 빠진 유엔 안보리의 개편을 요구할 정도다. 북·중·러는 당분간 유엔의 이런 입장을 바꿀 것 같지 않다. 러시아는 오히려 김 위원장에게 대북제재 품목인 소총과 무인기(드론)를 선물했다. 또 해외 여행 금지대상인 이병철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조춘룡 당 군수공업부장을 수행원으로 받아 들였다. 북한과 러시아가 노골적인 제재 허물기에 나선 셈이다.

다가서는 북·러와 달리 북·중관계는 상대적으로 삐걱거림이 감지된다. 미국과 갈등 중인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거리를 두고 있다. 북·러 밀착을 외형적으로는 방관하고 있다. 그러나 신냉전의 한 축인 중국이 북·러 협력에 소극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당장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김 위원장이 귀국한 다음날인 18일 모스크바를 찾았다. 다음달 푸틴 대통령의 방중 계획도 확정했다. 러시아가 2국 3각 게임에 나서는 모양새다.

결과적으로 김 위원장은 핵과 미사일 시위가 먹히지 않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전쟁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시선을 고려치 않는 우방국 러시아에 다가서면서 제재 무력화를 꾀하고, 북·미 거래의 중개인 역할을 할 여지가 있는 중국에는 일단 거리를 두는 건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 항공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김 위원장은 열차를 타고 열흘 간 평양을 비웠다. 그가 비행기로 미국을 다녀 온다면 더 큰 이익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