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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쓰나미' 덮친 美…소비 이끌던 베이비부머 왜 노숙자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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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한때 자동차 수리기사로 일했던 베아트리체 헤론(73)은 요즘 미국 애리조나의 노숙자 쉼터에서 매트리스에 의지해 잠을 청한다. 지난해 노인 시설에서 살았지만, 매달 받는 사회보장 급여(800달러·약 106만원) 중에서 75%인 600달러(약 79만원)를 내는 게 버거워 거리로 나오게 됐다. 이제 그는 사회보장 급여의 33%만 내면 되는 임대아파트에 살고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걸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WP)에 "거리의 분뇨에서 나는 악취를 견디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미국에서 최근 노숙자 중에 고령자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월 16일 캘리포니아주 LA의 노숙자 텐트촌 모습. 캘리포니아주는 지난해보다 노숙자가 10% 늘었다. AFP=연합뉴스

미국에서 최근 노숙자 중에 고령자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월 16일 캘리포니아주 LA의 노숙자 텐트촌 모습. 캘리포니아주는 지난해보다 노숙자가 10% 늘었다. AFP=연합뉴스

헤론처럼 최근 미국 각지에서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 59세~77세)가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면서 외신들의 조명이 이어지고 있다. WP에 따르면 치매·질병 등으로 의료시설에 보내지는 노숙자는 그나마 다행이고, 건강 악화로 거리에서 숨지는 일도 있었다. 고령 노숙자가 젊은 노숙자에게 지갑·가방 등을 도난당하는 사례도 많다고 전했다.

"실버 쓰나미"…"1930년대 대공황 이후 처음"

베이비붐 세대인 고령 노숙자의 증가는 미국 전역에서 확인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데이드 카운티에선 55세 이상 노숙자 비율이 코로나 이전인 2018년 25.4%에서 지난해 31.4%로 올랐다. 같은 기간 워싱턴주 벨링햄의 60세 이상 노숙자 비율은 9.8%에서 14.5%로 뛰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플로리다주 콜리어카운티 노숙자 연합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하루 새로 늘어나는 고령 노숙자는 2018년 59명에서 올해 195명으로 급증했다. 데니스 컬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WSJ에 "이 정도의 고령 노숙자 증가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처음"이라 말했다. 미국 전체 노숙자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은 가운데, 미정부의 주택도시개발부(HUD)는 고령 노숙자 급증을 계기로 뒤늦게 전체 주(州)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LA 에서 한 노숙자가 세간살이를 실은 카트를 옮기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LA 에서 한 노숙자가 세간살이를 실은 카트를 옮기고 있다. AFP=연합뉴스

코로나 주거 지원 종료, 주거비 상승도 원인

미국 인구의 약 22%인 베이비붐 세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풍요의 시대에 자라 소비문화를 주도했던 세대다. 이렇게 나고 자란 베이비붐 세대가 어쩌다 노숙자 신세가 된 것일까.

미국에서 베이비부머 노숙자가 급증한 이유로 외신들은 ▶코로나19 당시 시행됐던 주거 지원정책 종료▶임대료 등 주거비 상승▶취약한 사회보장제도에 따른 연금 부족 등을 꼽았다. 팬데믹 기간엔 연방·지방 정부가 각종 지원금을 줬고, 세입자가 임대료를 못 내도 퇴거를 못 하게 막았다. 이제 이런 보호조치가 중단돼 경제적 취약 계층이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급등한 주거비에 비해 부족한 연금도 베이비붐 세대를 짓누르고 있다. 미국의 퇴직자 상당수는 연금 등으로 얻는 월수입이 1000~1100달러(약 146만원)지만, 방 한 칸짜리 임대료가 최소 1800달러(약 239만원)다. 이러니 버틸 재간이 없다.

플로리다주 콜리어 카운티의 경우, 월평균 임대료는 2018년 1603달러(약 213만원)에서 올해 2833달러(약 376만원)로 치솟았다. AFP통신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에서 거주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일부 은퇴자들이 캠핑카나 트레일러 하우스를 집 삼아 '차박'하는 경우가 늘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 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미국 베이비붐 세대의 27%는 은퇴저축이 전혀 없다. 이들 상당수가 연금보장을 하지 않는 직장에서 근무했다. WSJ는 "베이비붐 세대 중 특히 60대는 2008년 금융위기 등 경제 침체기를 겪은 뒤 연금 지급이 중단된 직장에서 일했다"고 짚었다.

"10년 내 美 퇴직자 연금 780만원 줄어…대가는 납세자가 치러"

지난 2월 미국 LA에서 불을 피워 도넛을 구워먹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 AP=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 LA에서 불을 피워 도넛을 구워먹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 AP=연합뉴스

특히 베이비부머들이 65세 이상이 되는 2030년 무렵이 관건이다. 이들의 은퇴 물결이 이어지면서 미국의 연금수령자는 2010년 5300만명에서 2031년 7700만명이 될 전망이다. 반면 연금 보험료 납입 근로자 수는 같은 기간 19% 증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젊은 노동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악재다. 1984년 미국 노동인구의 60%는 40세 미만이었지만 이 비율은 45%로 내려앉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연금 수령자 대비 근로자 비율은 현재 2.9명에서 2031년 2.4명이 될 전망이다. 즉, 근로자 2.4명이 퇴직자 1명을 부양하게 된다는 얘기다. 부양해야 할 인구는 늘어나는 반면, 생산 인구는 급감하면서 '곳간'은 점차 비어 가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정치권이 손 놓으면 10년 내 모든 미국 퇴직자 연평균 연금이 6000달러(약 780만원) 감소할 것"이란 경고음이 나온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증세 정책 등은 공화당의 반대로 표류하고 있다.

WSJ은 "고령 노숙자가 늘어나면 의료비 등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면서 "미국 공공정책 전체의 위기에 따른 대가는 납세자가 치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뉴욕시의 경우, 의료 및 보호소 비용이 2011년 대비 2030년에 약 3배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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