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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급 안보 원한다" 빈살만 '배짱요구'에 속타는 바이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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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미동맹과 같은 공조를 해야 한다.” 

지난달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교부 장관의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이 미 조야를 뒤흔들었다. 코헨 장관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국교 정상화 협상을 진전시키는 가운데 사우디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원한다”면서 “미국의 확장 억제가 한국을 북한의 핵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듯, 사우디와 미국의 (군사)동맹은 아랍 국가들을 이란으로부터 보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람의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와 오랜 경쟁 관계인 이스라엘이 미·사우디의 ‘안보 조약’을 공개적으로 부채질하고 나선 데엔 이유가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사우디는 미국의 중재로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를 뒤바꿀 국교 정상화(평화 협정)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에 선결 조건을 요구했다. 중매결혼의 상대방이 아닌 중매인에게 ‘선불 청구서’를 내민 격이다.

코헨 장관의 WSJ 기고문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린 내용 등을 종합하면, 사우디는 크게 ▶미·사우디 간 안보 협력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또는 한미동맹급으로 업그레이드할 것 ▶사우디가 민수용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미국이 협조해달란 것 두 가지를 요구했다. 물론 사우디가 공식 인정한 적은 없다.

미 조야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미 싱크탱크 중동연구소(MEI)의 빌랄 사브 안보국장은 “나토와 한국 같은 동맹국과의 안보 조약은 전략적인 집단행동의 결과”라면서 “절대 군주제인 사우디와는 미국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안보 문제에 효과적이고 투명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진보 성향 온라인 매체 책임 있는 국정도 “북한과 달리 이란은 핵무기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한국과 사우디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며 “사우디와 안보 동맹을 맺으면 오히려 이란과 긴장이 심화할 것이고, 중동 분쟁에 미국이 끊임없이 딸려 들어갈 수 있다”며 반대했다.

이번 일은 미국 외교 정책의 숙원 사업인 중동 평화 체제 도입을 둘러싸고 관련국들의 치열한 샅바 싸움을 반영한다. 이번 판엔 4개국 4인의 지도자가 얽혀 있다. 대중 견제를 위해 평화 협정을 성사시키려는 바이든 대통령, 미국을 상대로 ‘배짱 영업’을 시도하는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이 기회에 중동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여기에 미국을 타고 팔레스타인 관련 양보를 최소화하려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까지 ‘4인 4몽’ 외교 각축전을 정리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①애타는 바이든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해 빈살만 왕세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해 빈살만 왕세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미국이 이번 협상에 몰두하는 이유는 하나다. 대중 견제를 위한 경제·안보 구상인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중국의 육·해상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해상 실크로드)를 차단하려는 미국의 시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9일 IMEC를 발표하며 “이게 진짜 빅딜”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이 IMEC에서 인도와 유럽을 잇는 핵심 고리가 사우디·이스라엘 구간을 철도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양국 간 국교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번 일은 탐나는 외교 과업이기도 하다. 전임 트럼프 정부의 이스라엘·아랍권 평화 협정인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의 국교 정상화)’에 필적하는 것이어서다.

바이든 정부의 거물급 외교·안보 책사들이 최근 석 달간 문턱이 닳도록 사우디를 찾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선임보좌관(5월·7월), 미 중앙정보국(CIA)의 윌리엄 번스 국장(5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6월), 브렛 맥거크 NSC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7월) 등이 거의 매달 빈살만을 면담했다.

②여유로운 빈살만

이런 가운데 빈살만은 사실상 ‘출구 전략 없는 협상 카드’를 바이든 정부에 던졌다. 빈살만이 요구하는 ‘안보조약+민수용 핵 개발’은 미국으로선 어느 쪽도 섣불리 들어줄 수가 없다. 사우디와의 안보 동맹은 중동에서 발을 빼 중국 견제에 집중하려는 미국의 대외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민수용 핵 개발 허용은 자칫 이란에 이어 사우디의 핵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빈살만은 이미 2018년 “이란이 핵을 개발하면 우리도 핵을 개발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빈살만은 동시에 중국을 지렛대로 끌어들이며 협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작년 시 주석의 국빈 방문에 이어 올해 3월 베이징에서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국교 정상화를 했고, 올해 사우디는 중국 주도의 정상급 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 4월)·브릭스(BRICS, 8월)에 연달아 가입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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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파고드는 시진핑

시 주석은 사우디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시의적절하게 실속을 챙기고 있다. 국영 중국핵공업집단공사(CNNC)를 동원해 미국이 선뜻 나서지 못한 원자력 협력을 “중국이 돕겠다”고 나섰다. CNNC가 사우디 동부의 원전 건설 사업에 입찰하면서다. CNNC의 쑨친(孫勤) 전 회장이 “국가 간 100년 결혼”이라고 할 정도로 원자력 협정은 양국 간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중국은 나아가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로부터 석유를 사들이며 위안화를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달러 약화도 노리고 있다.

④손 안 대고 코 풀려는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 7월 각료 회의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 7월 각료 회의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과 밀착하는 사우디를 지켜보는 미국은 애가 탈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이라도 협조적이어야 하는데, 역대 가장 우클릭했다는 네타냐후 연립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사실 네타냐후 총리로선 사우디와 빅딜을 내심 바라고 있다. 사법 개편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적인 외교 과업을 남기면 그의 장기 집권 가도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다. 그러나 그의 극우 연립 정부는 팔레스타인 관련 통 큰 양보 대신 ‘미·사우디 안보 조약’ 같은 부차적인 조건만 부각시키고 있다. 오히려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며 미국은 물론 사우디가 요구하는 ‘두 국가 해법’을 연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대 변수는 워싱턴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 배경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트럼프는 풀 수 있다?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킨 이번 사안을 놓고 미 현지 언론들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잘라서 풀 수밖에 없는 매듭)’이라고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미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미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대선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아한다”면서 “6~7개월 내 타결 아니면 노딜”이라고 보도했다.

통상 극비 협상은 그 과정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이번엔 협상 조건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점에서 “타결은 애당초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회의론도 있다. 16일(현지시간)엔 “사우디가 미국 측에 협상 결렬을 통보했다”는 아랍 매체 보도가 나왔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했다.

이와 관련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빈살만의 무리한 요구는 정권 초반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바이든 정부를 향해 일종의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라며 “내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되면 사우디와 미국의 긴장 관계는 일거에 풀릴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인권 문제를 대외 정책의 전면에 내세운 바이든 정부는 정권 출범 전후 빈살만을 향해 “국제 왕따로 만들겠다” “미 대통령의 상대는 왕세자가 아니다”며 의도적으로 그를 평가절하했다. 그랬던 바이든 정부에게 빈살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리고 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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