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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숫가루가 MSGR?…강남 40년 토박이, 압구정서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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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17층 호텔 건물에 지하 1층이 영어로 안내 돼 있다. 김민상 기자

1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17층 호텔 건물에 지하 1층이 영어로 안내 돼 있다. 김민상 기자

“혹시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 전 서울 압구정역 인근에 있는 고급 호텔. 건물 1층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지하 1층 식당을 찾던 방모(69)씨는 기자에게 다가와 조심히 말을 걸었다. 모든 안내판이 영어로 표기돼 있어 목적지 찾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서다.

방씨는 “말죽거리에서 40년 이상 산 강남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해외 곳곳을 여행 다녀봤는데 거기도 공공장소에는 한국어 안내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대접 받는 건 좀 심한 것 아니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대학교수나 기업 임원도 ‘새로 나온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데 차림표가 영어로만 돼 있어 주문을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도 했다.

18일 기자가 이 건물 지상 1층과 지하 1층을 살펴보니 안내판이 대부분 영문으로 쓰여 있었다. 압구정역 3번 출구로 연결되는 지하 1층은 ‘Retail(리테일)’이라는 영문과 함께 지하철역 안내가 있었다. 식당이나 꽃집 등 상점을 뜻하는 의미로 보였다.

바로 옆 안내판에는 ‘부베트’ ‘텍사스데브라질’ 같은 식당이 한글 없이 영문으로만 안내돼 있었다. 한 식당에 들어가 보니 영문으로 주요 음식이 쓰여 있었다. 순전히 한글로만 표기된 문구는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스푼과 포크를 사용해 격식에 맞게 즐겨 보라’는 안내가 유일했다. 서현정 세종국어문화원 책임연구원은 “‘볶음밥’도 유럽에서 자주 쓰는 ‘필라프’로 표기하는 식당도 있다”고 전했다.

이 호텔 인근 영국 콘셉트의 카페에는 오전 8시부터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매장 안팎에서 한글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중무휴는 ‘Open 7 days(오픈 세븐 데이즈)’로, 직원을 구한다는 알림조차 ‘Hiring(하이어링)’이라는 제목으로 적혀 있었다. 채용 조건까지 온통 영문이었다. 이 골목에 있는 카페 9곳 중 8곳의 간판은 모두 영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1층 상점 62곳 중 약국·중고명품 가게 18곳을 제외한 44곳의 간판이 모두 영문(국문 혼용 포함)으로 표기됐다.

전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대형 카페를 찾았다. 이곳에선 미숫가루를 ‘MSGR’라고 표기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 카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마포구 연남동 등 주요 상권에 1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주문을 해보니 잠시 기다리라는 뜻의 영문인 ‘Please wait(플리즈 웨이트)’가 종이에 적혀 대기 번호표와 함께 나왔다.

이곳에서 음료를 마시던 윤모(43)씨는 “노키즈(No Kids)존처럼 영어를 못 읽는 세대는 오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 같다”고 말했다. 업체 측은 이에 대해 “외국인 고객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구역이 있는데다 좁은 공간에 국어와 영어를 혼용해 쓰면 이해하기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며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하고 타깃 고객을 명확히 하는 마케팅으로 봐달라”고 설명했다.

지난 17일 경기 성남의 한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카페 메뉴. 미숫가루가 영문으로 MSGR로 표기됐다. 김민상 기자

지난 17일 경기 성남의 한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카페 메뉴. 미숫가루가 영문으로 MSGR로 표기됐다. 김민상 기자

이처럼 서울 강남 일대에서 시작된 ‘한글이 사라진’ 안내판·차림표는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그만큼 논란도 커진다. 옥외광고물 관련 법에 따라 면적 5㎡ 미만이거나 건물 3층 이하에 표시된 간판은 한글 표기가 없어도 과태료 같은 제재를 받지 않는다.

권재일 한글학회 이사장(전 국립국어원장)은 “무분별한 영어 간판은 ‘우리말보다 외국어가 품위 있다’는 잘못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특히 건물 1~2층 간판은 법을 바꿔서라도 한글이 같이 표기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도 “비싼 음식점에서 영어를 쓰면 영어가 우리말보다 좋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목소리도 있다. 직장인 추모(38)씨는 “최근 카페 주인들은 특정 소비층에 집중해 자기만의 브랜드와 정체성을 갖고 영업을 한다”며 “이런 개성은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법으로 영어를 공식 국가 언어로 지정해 강제 사용을 시도하던 적이 있었지만 “인종 차별 소지가 있다”는 우려로 번번이 무산됐다. 현지 식당에서도 ‘여기는 미국이다’며 ‘영어로 주문하라’는 안내판이 걸려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붙은 영어 사용 권고 안내문. 사진 크리에이티브커먼즈 캡처

미국 콜로라도주에 붙은 영어 사용 권고 안내문. 사진 크리에이티브커먼즈 캡처

싱가포르의 한 공사장에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 다음에 한국어가 표기 돼 있다. 김민상 기자

싱가포르의 한 공사장에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 다음에 한국어가 표기 돼 있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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