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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응급 소생술’ 필요한 사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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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홍승기 인하대 법전원 교수·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홍승기 인하대 법전원 교수·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사법부의 권위는 재판의 신뢰성에서 나온다. 정치가 망가져도, 수사기관이 실수해도 법원이 마지막 안전판이라는 오랜 믿음이 있었다. 권순일 전 대법관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가 선거방송 TV 토론 중에 했던 거짓말에 대해 ‘허위사실 공표’가 아니라는 납득 어려운 논리를 동원해 면죄부를 줬다. 법조를 출입하던 김만배 기자가 대법원 구내 이발소를 드나들기 위해 대법관 이름을 방문록에 썼다고 주장하면서 대법관의 권위는 폭락하고 말았다.

김명수 대법원 체제 신뢰성 위기
정치 진영·이념 편향 판결 잇따라
신속·성실 재판 여건 만들어 가야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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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영상물 ‘백년전쟁’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히틀러의 참모 괴벨스에 비유해 ‘악질 친일파’, ‘A급 민족반역자’로 표현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라는 식으로 매도한 영상물인데도 다수 대법관이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백년전쟁’ 방송을 금지하지도 않았고, 영상 일부를 삭제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방통위가 ‘관계자에 대한 징계 및 경고’라는 가벼운 제재를 하자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방통위 조치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가 되면서 굳이 대법원이 파기 환송했다. 대법관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고, 의견이 동수로 대립했는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파기 쪽에 가담했다.

지금 이 나라 사법부의 모습은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어느 정도 예상됐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헌재의 탄핵 결정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죄 판결도 그랬지만, 양승태 체제에 대한 법원 내부의 과격한 공격이 신호탄이었다.

‘자칭 개혁파’ 판사들 사이에서 “양승태 코트(Court·법원)를 날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더니, 판결서 작성에 대한 선배 법관의 조언이 ‘재판 관여’로 몰리고 법관 탄핵 사유로 둔갑했다. ‘검찰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더라’는 환호까지 들렸다.

그런 바람을 주도한 판사는 정치권의 연락을 받자 홀연히 법원을 떠나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른바 ‘사법 적폐 숙청’ 작업으로 형사처벌, 징계, 부당 인사의 대상이 된 엘리트 법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법원을 떠났다. 자칭 개혁파 판사로부터도 “사실은 법원행정처 출신이 요직을 독점하는 데 대한 불만이었는데 너무 나갔다”는 뒤늦은 자책이 들린다. 법관 사회에서는 아예 말을 삼가는 분위기가 됐다고도 한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가장 우수한 자원으로 충원해야 한다. 훌륭한 선배가 대법관으로 헌재 재판관으로 자리 잡는 현실이 후배 법관들에게는 직무에 헌신할 동기가 된다. 그러한 헌신으로 건강한 사법부가 유지됐다.

평생 ‘반(半) 정치인’ 행세를 하던 변호사나 대형 로펌의 발주로 의견서 쓰기에 바쁘던 로스쿨 교수가 현직 법관들의 소명감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없애고 모두 어깨동무하고 함께 정년을 맞자는 평등주의, 인기투표로 법원장을 결정하자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재판 지연 외에 어떤 장점을 보여줬나.

지난 6년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 업무 효율도 떨어뜨렸다. 엘리트 법관을 일반직 직원으로 대체하고, 무책임한 자문회의를 잔뜩 신설했으니 법원행정처가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과도한 친노조정책에 신바람이 난 서울중앙지방법원 노조는 ‘6시 이후 재판은 진행 말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 정진석 국회의원(국민의힘)에 대한 명예훼손 실형 판결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닐 거라 본다. 대법원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구성원인 판사들 스스로 사법부의 무게를 솜털같이 여기게 된 탓이 아닐까 싶다.

지난 6년간 김명수 대법원 체제를 거치며 사법부의 붕괴도, 시민의 분노도 임계점에 와 있다. 법원은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법원의 정치화는 위험 수준이다. 새 대법원장의 ‘응급 소생술’에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인사가 만사’이니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를 되살리고, 법원장 추천제를 폐기해 회생의 첫발을 떼야 한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법원 내부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유능한 판사들로 임명해야 한다. 법원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신속하고 올바른 판결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으면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승기 인하대 법전원 교수·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