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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회숙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현대적 울림으로 재현된 중세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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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회숙 음악평론가

진회숙 음악평론가

1981년에 개봉된 ‘엑스칼리버’는 아서 왕의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소년왕으로 추대된 아서가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 장면에 귀에 익은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카를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에 나오는 ‘오! 운명의 여신이여!’다.

‘카르미나 부라나’는 골리아드라는 중세 음유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골리아드는 10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와 독일, 잉글랜드,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자와 성직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술, 여자, 사랑, 봄, 축제, 도박 등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 운명의 여신이여!’에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먼 시대, 그 시대의 한 부분을 비추었던 찬란한 중세적 역동성이 도사리고 있다. 술과 노래를 벗 삼아 이곳저곳을 방랑했던 중세의 음유시인들은 운명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한탄한다. “오! 운명의 여신이여! 그대는 달처럼 변화무쌍하게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 비천한 인간들은 절대로 운명의 절대적인 횡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운명이 때로는 미소를 보내고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지만 곧 변덕스럽게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간다는 것을.

그런데 이런 한탄조의 가사에 20세기 작곡가 카를 오르프는 아주 역동적인 음악을 입혔다. 그 덕분에 중세의 노래가 현대적인 역동성을 갖게 되었다. ‘오! 운명의 여신이여!’는 듣는 사람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화음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하면서도 특징적인 리듬을 계속 반복하는데, 그 느낌이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또 중세적이다.

진회숙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