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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줄어도 마음 커져" 1.7조 기부하고 100세에 떠난 회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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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2019년 7월 30일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2019년 7월 30일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인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13일 오전 1시 48분 100세 나이로 타계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00년부터 1조 7000억원에 달하는 사재를 털어 장학사업을 이어왔다.

1923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이 전 회장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메이지대학교 경상학과를 수료했다. 그러나 같은 해 태평양전쟁 막바지 학병으로 끌려가며 옛 소련과 만주 등지에서 역경을 겪었다. 1945년 8월 이 전 회장이 속한 부대가 오키나와로 이동하기 위해 한반도에 머물던 도중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에는 정미소 사업을 시작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6·25전쟁이 터진 후 1953년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시장에서 보따리 장사를 했다. 1958년에 서울 제기동에서 삼영화학공업을 설립하고 플라스틱 사출기 1대로 바가지 등을 판 것이 삼영그룹의 시작이다. 삼영그룹은 현재 삼영중공업 등 10여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플라스틱 상품을 넘어 전자 제품의 핵심 소재인 캐퍼시터 필름(Capacitor Film·축전 및 절연용 필름) 등에 눈을 돌린 이 전 회장은 꾸준히 사업 규모를 키웠다. 그는 타계 보름 전까지도 산하 기업들의 생산 현장 등을 직접 살폈다고 한다.

사업에 열중하던 이 전 회장은 지난 2000년 개인 재산으로 ‘관정이종환재단’이라는 교육 재단을 설립했다. 생전 ‘구두쇠’ 소리를 듣던 그가 이 재단에 쾌척한 재산은 1조 7000억원에 달한다. 강제 징집을 겪은 그는 지난 2019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고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됐다”고 교육재단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재단에선 매년 국외·국내 장학생 수백명을 선발해 지원해왔다. 그는 특히 이공계, 자연과학 분야의 경쟁력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한다. 지난 2008년 나온 자서전 『정도(正道)』에선 “(기부할 때마다) 내 재산은 줄어들었지만 내 마음은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천사처럼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천사처럼 쓸 수는 있다’는 게 평소 이 전 회장의 지론이었다. 관정재단 장학생 수는 지난 23년간 1만2000여명에 이르고 박사학위 수여자도 750명에 달한다.

지난 7월 14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장학증서 수여식에 모인 장학생과 재단 관계자들. 사진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지난 7월 14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장학증서 수여식에 모인 장학생과 재단 관계자들. 사진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600억원을 지원해 서울대에 총면적 2만5834㎡ 규모의 전자도서관을 짓기도 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한 그는 2014년 서울대학교 명예 공학박사 학위 취득했다.

그는 사회 기여와 장학 공로로 2009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훈했다. 2021년엔 제22회 4·19문화상을 수상하고, 성균관대학교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전 회장은 생전 노벨상의 권위를 뛰어넘는 ‘한국판 노벨상’도 구상했다. “사후 적절한 시기에 검토하라”는 고인의 지시에 따라 후대의 숙제로 남게 됐다. “정도(正道)대로 살아라. 정도가 이긴다. 그동안 좋지 않았던 일은 모두 용서한다. 장학재단과 회사가 영구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도록 잘 이끌어 나가주길 바란다. 장학재단은 100년이고 1000년이고 영속적으로 갈 수 있었으면 한다.” 타계 직전 이 전 회장이 가족과 측근들을 병상으로 불러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다.

유족으로는 장남 이석준 ㈜삼영 대표이사 회장을 비롯해 2남 4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8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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