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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보다 늦은 모로코 구조대…"우리 임무는 구조 아닌 복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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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북아프리카 국가 모로코를 덮친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3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1960년 1만2000명의 사망자를 냈던 모로코 아가디르 대지진 이후 60여년 만에 겪은 최악의 지진 피해다. 매몰자 구조와 생존자 구호를 위해 해외 긴급구조팀이 속속 합류하고 있지만, 골든타임(지진 발생 후 72시간)이 지나면서 모로코 당국의 대응은 구조에서 복구로 전환하는 분위기다.

1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CNN 방송, 워싱턴포스트(WP) 등은 모로코 구조대가 지진 발생 나흘째인 이날 진앙에 가까운 이주카크·이길·아그바르·두아르트니르 등 하이 아틀라스의 산간 마을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해외 구조팀 가운데 가장 먼저 모로코에 도착한 스페인 긴급 구조대는 탈랏 니야쿠브와 아미즈미즈 마을 등에 투입돼 모로코 구조대와 합류했다.

모로코 내무부는 이날 오후 7시 기준 지진 사망자 2862명, 부상자 2562명으로 집계했다. 가디언은 구조대가 뒤늦게 가장 큰 피해 지역인 산간 마을에 진입하면서 사망자 수가 대폭 늘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스페인 군비상부대가 10일(현지시간) 지진 피해를 당한 모로코의 구조 작업을 돕기 위해 군용기에 탑승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스페인 군비상부대가 10일(현지시간) 지진 피해를 당한 모로코의 구조 작업을 돕기 위해 군용기에 탑승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진 발생 나흘째에야 피해지역 진입

이날 모로코 구조대는 낙석과 붕괴된 건물 잔해 등으로 가로막힌 산길을 불도저로 뚫으며 산간 마을에 들어섰다. 두아르 트니르 마을에 모로코·스페인 구조대가 도착하자 일부 주민들은 “왜 이제야 왔냐”며 원망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현장에 도착한 스페인 구조팀도 바로 생존자 찾기에 투입되진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알버트 바스케스 스페인 구조팀의 통신 담당자는 “우리 팀이 정확히 어디에 필요한지 결정하고 모로코 대원들과 원활하게 협업하기 위해 회의를 기다리고 있다”며 “이미 골든타임이 지나 시간이 부족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앞서 스페인 구조대는 지난 2월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에서 지진 발생 7일 만에 생존자를 구조한 적 있다.

이미은탈라 마을에 투입된 스페인 구조대원 안토니오 노갈레스는 “단 한 채의 집도 똑바로 서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됐다”며 상황을 전했다. 아미즈미즈 마을로 가고 있다는 영국 구조단체 이엠티(EMT)의 톰 고드프리 팀장은 “구호가 더 늦어지면 질병의 위험이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평소에도 인도주의적 구호가 절실히 필요한 모로코 남서부 지역에 최악의 지진 피해가 덮쳤다며 안타깝다고 전했다.

구조가 급한 상황이지만 현재 모로코 정부는 영국·카타르·스페인·아랍에미리트(UAE) 등 4개국의 구호 제안만을 받아들였고, 프랑스·독일 등의 지원 의사에는 여전히 답하지 않고 있다. 독일은 모로코 지진 직후,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때 구조 작업에 투입됐던 연방기술구호국 소속 50명을 긴급 선발해 파견팀을 구성했으나 모로코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독일은 “지금부터는 구조팀 파견이 아닌 구호물자 전달 등으로 모로코를 도울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11일 모로코 알하우즈의 지진 피해 지역에서 한 구조대원이 잔해를 헤치며 생존자를 찾고 있다.AFP=연합뉴스

11일 모로코 알하우즈의 지진 피해 지역에서 한 구조대원이 잔해를 헤치며 생존자를 찾고 있다.AFP=연합뉴스

"현재 임무는 구조 아닌 복구" 

뒤늦게 산간 마을에 들어간 모로코 구조대는 생존자 찾기보다 이재민 돌봄과 시설 복구 등에 치중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수색견과 장비를 동원해 매몰자를 찾기에 앞서 야전 병원과 이재민 쉼터를 제공하고 시신을 수습하고 산사태로 막힌 길을 정비하는 데 우선하고 있다. 탈랏 니야쿠브에 들어선 한 모로코 구조대는 WP에 “더 이상 생존자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면서 “현재의 임무는 구조가 아닌 복구”라고 전했다.

일부 모로코인들은 정부의 대응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모로코 경제학자 푸아드 압델모움니는 “구조가 너무 늦게 시작됐다”면서 “아직 상태가 양호해 접근 가능한 지역조차 구조대가 진입하지 않아 희생자들이 48시간 이상 방치됐다”고 NYT에 말했다. 국제 인권단체 기아대응행동에서 일했던 실비 브룬넬 지리학 전문가는 “하이 아틀라스처럼 외딴 산악 지역에 대한 긴급 구조 작업은 피해 발생 직후 48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고립된 마을을 찾아갔다. 이재민을 돕기 위해 노새·당나귀를 타고 물·담요·약품·음식을 실어나르는 한편 매몰된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맨손으로 잔해를 파헤치고 있다. 부상자를 위한 헌혈 대열도 이어졌다. 시민 모하메드 벨카이드(65)는 “재난 극복에 모두 동원돼야 하지만 지금 정부만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11일(현지시간) 모로코 지진 피해 지역인 타루단트에 부상자들이 길거리에 누워있다. AFP=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모로코 지진 피해 지역인 타루단트에 부상자들이 길거리에 누워있다. AFP=연합뉴스

"국왕, 1년에 200일 프랑스서 보내"

아지즈 아크하누크 모로코 총리는 11일에야 지진 이후 첫 성명을 발표하며 “구조와 구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총리와 무함마드 6세 국왕 모두 아직까지 대국민 연설을 하지 않고 있어 당국이 지진 피해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국가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무함마드 6세가 지진 발생 당일 프랑스 파리의 사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알려져 공분을 사고 있다. 무함마드 6세는 지난 2020년 칼리드 빈 술탄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에게 최소 8000만 유로(약 1142억원)를 주고 사들인 프랑스 파리의 대저택에 체류하다가 지진 발생 12시간 후 귀국해 비상회의를 주재했다.

모로코의 무함마드 6세 국왕(가운데)이 지난 9일 라바트 왕궁에서 지진 발생에 대해 비상 회의를 주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모로코의 무함마드 6세 국왕(가운데)이 지난 9일 라바트 왕궁에서 지진 발생에 대해 비상 회의를 주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모로코 전문가인 사미아 에라주키는 “모로코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에선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승인이 나오기까지 어떤 일도 처리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무함마드 6세가 이전에도 나라를 오래 비우고 해외에서 호화 생활을 즐겼고, 지난해엔 200일을 프랑스에 머물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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