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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중도층 하기에 달린 역사전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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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호 31면

한경환 총괄 에디터

한경환 총괄 에디터

한번 붙었다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여야가 또다시 ‘역사·이념전쟁’으로 제대로 붙었다. 이번엔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며 독립군에게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안긴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이 전쟁의 대상이 돼 버렸다. 허구한 날 거의 모든 사안을 놓고 여야가 서로 으르렁대니 이번 역사전쟁도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다. 육사에 설치된 홍 장군의 흉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계획이 실제로 이행되는 그 순간 또 한 번 거대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보수·진보의 홍범도 흉상 이전 다툼
대중 설득 못 하는 쪽이 패배할 것
정쟁 당사자도 ‘역사법정’ 심판 대상
합리적 중도, 방관 말고 목소리 내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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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흉상을 2018년 육사에 설치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이전 중단 요구 문제로 다투다 급기야 한국사 일타강사의 정치 성향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번진 흉상 정쟁은 지금 한국의 민낯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사건은 전한길 강사가 언급했듯이 “정치적인 문제로 변질”한 그동안의 숱한 이슈들 중 하나다.

흉상 이전은 육사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지만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방부와 국가보훈부, 대통령실 등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당은 “신친일파가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을 편들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난도질하고 모독하고 있다”(서은숙 최고위원)라거나 “신내선일체를 추구하는 윤석열 정부”(김성주 정책위 수석부의장)라고 공세를 퍼붓고 있다. 심지어 “한·일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 철거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김병주 의원)고 말하기까지 한다.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한국만큼 과거사 문제를 놓고 치고받는 싸움을 하는 나라는 드물 것이다. 날만 새면 역사 문제를 들고나와 전쟁을 벌인다. 여야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깃발을 들고 출정가를 부르기만 하면 양쪽으로 뚜렷이 나뉜 진영 추종자들은 대오를 갖추고 백병전에 들어간다. 한결같은 패턴이다. 이런 풍토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 없이는 진영 맹목적 추종자들이 탐욕스러운 여야 정치인들이 몰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동상이나 흉상은 최근 들어 한국에서 항상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맥아더 동상도 그랬고, 평화의 소녀상도 그랬다.

문제는 앞으로도 역사 문제를 내세운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팩트와 관계없이 맞붙어 싸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영논리에 예속되지 않은 중립적인, 합리적인 중도층이 팩트와 의견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거나 지적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가짜뉴스와 엉터리 억지 주장을 판별해 내고 이길 수 있는 것은 역사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확한 팩트 확인과  논증이다. 누군가는 시시비비를 가려 줘야 한다. 서로 일시적으로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는 사태를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

‘싸움을 위한 싸움’을 하더라도 룰은 있는 법이다. 국민 대중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쪽이 역사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홍 장군의 흉상을 그렇게 옮기고 싶다면 결정적인 흠결을 찾아내야 한다. 여당 일각에서 주장하는 1921년 자유시 참변(소련 적군에 의해 우리 독립군 다수가 몰살당한 사건)에 홍 장군이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와, 홍 장군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실제로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정확히 입증해야 할 것이다. 밝힐 수 없다면, 밝혀지지 않는다면, 설득할 수 없다면 흉상을 그대로 두는 것이 현명하다. 야당도 신내선일체니 신친일파니 과도한 정치 공세에만 치중한다면 집토끼야 잡을 수 있겠지만 다수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사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역사법정’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뱉은 말들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보수니 진보니 이념을 내세우는 양극단 세력이 다수 국민을 인질로 삼고 사회를 분열과 갈등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개중에는 정치적 이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활용해 개인의 권력과 부귀영화만 좇는 정치인들이 너무나 많다. 무늬만 보수, 무늬만 진보인 척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만 노리는 어두운 세력들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당파싸움으로 몰고 가 궤멸시키려는 정치인들을 내년 총선에선 물갈이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층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중립·중도·중용 세력이 건전한 지성이 튼튼하게 뿌리 내리는 건강한 대한민국으로 탈바꿈시켜야 할 것이다. 실제로 중도파의 영향력은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홍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달 28∼30일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윤 대통령 지지율(국정운영 긍정평가)은 59%로 2주 전 조사보다 5%포인트 내렸다. 특히 이념 성향이 중도라고 한 응답자의 윤 대통령 지지율은 2주 전 29%에서 이번 조사 20%로 9%p나 하락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TV 조사(지난 2~3일)에서도 중도층의 윤 대통령 지지율은 한 달 전 조사(31.8%)보다 9.3%p 내린 22.5%로 집계됐다. 중도층이 돌아서면 민심 악화는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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