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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반해 교수직도 포기했다, 실험적 조각가 김윤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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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경기도 화성 작업실에서 작품을 제작 중인 김윤신 작가. [사진 김윤신·황인]

경기도 화성 작업실에서 작품을 제작 중인 김윤신 작가. [사진 김윤신·황인]

김윤신은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의사였다. 위로 언니가 넷, 오빠가 한 명 있었다. 김윤신의 소녀시절은 태평양전쟁의 말기였다. 모든 게 궁핍했다. 콩기름을 짜다 남은 콩깻묵이 식량이 되기도 했다. 빈곤 속에도 풍요가 있었다. 원산 앞바다에는 가자미가 널렸다. 그걸로 가자미 식해를 만들었다. 원산에서 남쪽으로 삼십리 떨어진 안변으로 이사를 갔다. 봄이면 향긋한 사과꽃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부친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 목단강으로 가서 한의사를 했다. 김윤신의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왔다. 김윤신은 부친이 있는 목단강으로 갔다. 원산과 안변에서는 너무나 귀했던 삶은 달걀이 아무렇게나 한 광주리 담겨있었다. 부친이 마음껏 먹으라 했다. 그걸 하루에 몇 개나 먹었을까. 사흘도 안되어 그걸 다 먹었다. 귀한 달걀로도 포만감을 느끼게 한 목단강의 기억은 참 풍요로웠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노경 작가의 깨우침

여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광복이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두만강은 도강이 힘든 국경이 되어버렸다. 부친은 딸에게 사리원 출신의 아주머니를 붙였다. 트럭을 타고 도문(투먼)에 도착했다. 도문에서 두만강을 건너려는데 강 저편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일행은 황급히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물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개울처럼 좁은 두만강이 나타났다. 감시를 피해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왔다. 걷고 또 걸어서 청진에 도착했는데 너무 힘들었는지 기절하고 말았다. 김윤신을 안변까지 데려다줄 교통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김윤신은 아주머니를 따라 황해도 사리원으로 갔다. 일년을 사리원의 아주머니 집에서 살며 동광국민학교를 다녔다. 마침 아주머니의 딸이 그 학교 교사라서 쉽게 편입할 수가 있었다. 1년 후 안변으로 돌아가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빠가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월남을 결심했다. 1947년 철원을 거쳐 서울에 왔다.

서울의 거처는 충무로 2가의 한미호텔이었다. 지금의 명동역 8번 출구 북쪽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던 한미호텔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가족들의 임시거처였다. 조소앙, 신익희, 김성숙, 장준하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거물들과 함께 어린 김윤신이 한미호텔에 둥지를 틀 수 있었던 건 오빠 김국주 덕이었다. 여동생의 예술가 인생을 응원했던 오빠는 나중에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김윤신의 조각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2022) 은행나무, 80x90x85㎝. [사진 김윤신·황인]

김윤신의 조각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2022) 은행나무, 80x90x85㎝. [사진 김윤신·황인]

곧 6.25 전쟁이 났다. 김윤신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이 난리통을 전후한 몇 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학교를 다녔는지 안 다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만큼 그 시절도 그녀의 삶도 불안정했다. 김윤신은 상명여고를 졸업하고 1955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원산에서 북쪽으로 백리 떨어진 함경남도 고원 출신의 조각가 이승택은 나이가 3년 위였지만 함께 입학했다.

1963년 말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한묵이 2층을 쓰던 아파트의 4층에 방을 구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 조각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조각과 지도교수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홍익대 후배 석난희가 학생으로 있던 석판화 반에 들어갔다. 담당교수는 석판화의 생명은 흑백의 농담임을 강조했다. 석판화용 돌판은 대리석의 일종인 라임스톤을 사용한다. 판에다 그림을 새기려면 먼저 두툼한 돌판의 표면을 거친 모래와 고운 모래로 마판작업을 해야 한다. 마판을 하고 프레스기를 돌리는 등, 판화 작업에 요구되는 노동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노동에는 왕성한 식사가 따라야 한다. 파리의 음식값은 비쌌다. 웬만하면 값싼 학생식당에서 다 해결했다. 뤽상부르 공원 근처 골목에 베트남 식당이 있었다. 부담 없는 가격의 월남국수에 숙주나물을 듬뿍 얹어 먹으며 외식의 기분을 내었다.

파리 시절을 함께 보낸 미술인으로는 이응노, 한묵, 문신, 이일, 석난희, 권영숙, 이희세, 방혜자 등이 있었다. 이응노(1904-1989)는 동양화가이지만 새로운 재료에 대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강했다. 조각작품을 하고 싶은데 경험이 없었다. 후배인 김윤신이 도움을 주었다. 그 덕택인지 이응노는 수많은 목조각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다.

프랑스의 68운동을 목전에서 지켜보았다.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1969년에 귀국했다. 신촌 와우아파트 근처에 있던 박서보의 자그마한 작업실을 세 얻어 작업실로 썼다. 나중에는 그 작업실을 매입했다. 홍대 근처라서 작업실은 여러 미술동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새기는 조각은 나누기, 빚는 소조는 더하기

홍익대학교 교수진들과. 1970년대 초, 왼쪽부터 박서보, 한사람 건너 전뢰진, 임완규, 김원, 남관, 조복순, 송수남, 김윤신. [사진 김윤신·황인]

홍익대학교 교수진들과. 1970년대 초, 왼쪽부터 박서보, 한사람 건너 전뢰진, 임완규, 김원, 남관, 조복순, 송수남, 김윤신. [사진 김윤신·황인]

상명여대 교수로 재임중이던 1984년, 조카가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로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여행이었다. 아르헨티나 전역을 여행하며 알게 된 건데,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목질이 단단한 나무들이 너무 많았다. 김윤신은 이 나무로 조각을 하고 싶었다. 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고부안 문화공보관을 찾아가 전시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왕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현대미술관’에서 하고 싶다고 했더니 로베르토 델 비자노 관장과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보여줄 작품이 하나도 없다. 물론 작업실도 없다. 관장에게 두 달의 시간을 달라 했다. 나무를 구해다가 톱, 망치, 끌을 들고 길에서 작업했다. 노상 조각가였다. 작품 두 점이 완성되었다. 관장이 만족했다. 나무의 속살과 껍질, 조각의 내부와 외부가 동시에 드러나며 공간을 제시한 조각품은 미술관 경력 30년의 관장의 눈에도 너무나 신선했다. 1년 동안 30점을 제작하여 전시를 열었다. 대성공이었다. 한 달 일정의 전시가 두 달로 연장되었다. 미술관, 화랑에서 3년 치의 전시회 제의가 몰려들었다. 진화랑 전시를 계기로 3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김윤신은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교수직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오랜 아르헨티나 생활을 한 김윤신은 국내에서 몇 번의 개인전을 현대화랑 등에서 열었다. 올해 2월에 시작한 남서울미술관의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회는 충격적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왕성한 활동의 현역 조각가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여러 장르의 예술가 가운데서도 조각가의 몸은 참으로 아름답다. 순수한 노동의 몸이기 때문이다. 몸을 쓰는 조각가들이 점점 멸실되어가는 추세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조각가 김윤신은 그 몸으로도 이미 빛나는 존재다.

김윤신은 매일 4시간에서 6시간 정도의 작업을 꾸준하게 한다. 오전에는 노동의 강도를 요구하는 조각을 하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며 몸을 푼다. 건조한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습기가 많은 한국의 여름을 맞아 다리가 좀 불편해진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픈 데도 없다. 지금은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있다. 어릴 때 살았던 안변과 양구가 분위기가 서로 비슷해서 마음이 편안하다 한다.

그의 작품명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이 있다. 둘을 더하면 하나, 둘로 나누어도 하나라는 뜻이다. 조각과 소조를 아울러 조소(彫塑)라 한다. 새겨나가는 조각은 나누기 작업이고 빚어나가는 소조는 더하기 작업이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조소의 본령이자 노경의 김윤신이 깨우친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다.

음식은 특별히 가리지 않는다. 아침에는 야채, 점심으로 된장찌개 등 백반 정식을 먹고 저녁은 안 먹을 때도 많다. 식당에서 식사하고 음식이 남으면 싸달라 해서 가지고 와서 먹는다. 매우 검박한 식사다.

원산, 안변, 목단강, 사리원, 서울, 부산, 파리, 아르헨티나, 양구. 지구인 김윤신은 참으로 많은 곳을 거침없이 다녔다. 조각가 김윤신의 실험적 행보 또한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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