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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욱, 조각 빚다 흙에서 새싹 난 작품 국전서 ‘대통령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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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호 20면

예술가와 친구들 

조각가 박병욱(1939~2010). [사진 박병욱 유족]

조각가 박병욱(1939~2010). [사진 박병욱 유족]

조각가 박병욱(1939~2010)이 나서 자란 곳은 대구시 공평동 16번지다. 중앙초등학교였는데 지금은 2·28 기념 중앙공원이 된 터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인 신의주 출신 박경석과 박경환 형제는 대구에 터를 잡았고 공평동 16번지에서 함께 살았다. 형인 박경석에게서 박병욱이, 동생인 박경환에게서 박관욱(1950~ )이 태어났다. 조각가 박병욱과 그의 사촌동생 화가 박관욱은 원적이 같다. 둘 다 서울예고와 서울대 미대를 나왔으니 생이지지와 학이지지가 서로 겹친다.

박경석은 어묵 공장을 하는 큰 사업가였다. 공평동 16번지에 대지 300평에다 방이 열 몇 칸이나 되는 큰 적산가옥을 구할 수가 있었다. 박경석의 부인은 시조카인 박관욱을 끔찍이 챙겼다. 아들도 모르게 닭을 잡아 나이 어린 조카 박관욱에게 먹였다. 나이 열 살이 더 많은 형 박병욱은 이게 불만이었다. 부인은 닭이 죽어서 할 수 없이 닭을 잡아 먹였다고 변명을 했다. 그럼 죽은 닭을 먹지 산 닭을 먹나요 하며 아들은 어머니에게 따졌다.

화가 박관욱이 사촌, 어릴적 함께 살아

박경석은 묵호에 어묵공장을 만들었는데 공장 문을 여는 날에 6·25 전쟁이 터졌다.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마산에 어묵공장을 세웠다. 마산에 놀러 간 박관욱은 밤에 어묵공장에서 생선이 마르면서 뿜어내는 인광이 해풍을 타고 춤추는 걸 보았다. 마산의 어묵공장도 실패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박관욱의 아버지 박경환은 공군장교였다. 친구인 조각가 백문기(1927~2018)가 공군장교로 함께 근무했다. 백문기는 친구의 집에서 만난 경북중학교 학생 박병욱이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알고는 서울예고에 진학할 걸 권했다.

1955년 박병욱이 서울예고에 진학할 무렵 박경석 형제는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예고 입시에는 석고데생이 있었다. 박병욱은 그림을 잘 그리긴 했지만, 석고 데생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난감했다. 박병욱은 석고상을 무시하고 자신이 보았던 영화 ‘흑기사’에서 주인공이 말을 타고 싸우는 장면을 그렸다. 전혀 엉뚱한 그림이었는데도 합격했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이제 더 이상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은 남산과 을지로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골동품이 남아 있어 그걸 하나씩 팔아가며 생활을 이어갔다.

박병욱 조각 작품 ‘갈渴’(1978), 청동 30x110x16㎝. [사진 박병욱 유족]

박병욱 조각 작품 ‘갈渴’(1978), 청동 30x110x16㎝. [사진 박병욱 유족]

1958년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김종영, 김세중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군대에 갔다. 4학년 2학기에 복학을 했다. 회화과 여자 후배인 문길자(1942~)가 동기가 되어 있었다. 서로가 좋아졌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는 화가 권옥연이 경영하던 명동의 누아르 다방이었다. 문길자는 굽 높은 하이힐에 가슴에 책 한 권을 안아 멋을 부렸다. 하이힐의 높은 굽이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보도블록 사이에 끼인 굽이 흔들거렸다. 박병욱은 걷기가 불편해진 문길자를 부축하여 동숭동의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문길자의 부친은 서울대 문리대의 체육교수 문영현이었다. 가족들은 동숭동 서울대 관사에서 살았다. 박병욱의 집은 불광동 산 40번지. 주소 하나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산비탈 집이었다. 말이 집이지 실은 움막이었다. 이날 밤은 동숭동에서 불광동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가 없었다. 버스 차장에게 하소연하여 공짜버스를 타고서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박병욱과 문길자는 명동에서 데이트를 하고 서울의대를 가로질러 동숭동으로 함께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의대 함춘원 근방의 숲이 짙었다. 뜨거워진 두 남녀는 숲의 어둠 속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박병욱은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예고 강사가 되었다. 매달 받는 강사료는 5천원이었다. 두 사람이 살아가기엔 빠듯한 돈이었다. 결혼을 앞둔 박병욱은 1967년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디자인회사인 한국문화인쇄에 입사했다. 전국 달력디자인 경연대회 1등 수상했고 펩시콜라 한글로고 등 상업용 로고작업을 다수 진행했다. 1967년 둘은 결혼했다. 불광동 김종영의 처제 집의 단칸방을 월세로 빌어 터를 잡았다. 근처에 살던 사촌동생 박관욱 형제가 이들의 신혼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이 무렵 은사 김세중은 광화문에 세워질 이순신장군 동상을 제작하고 있었다. 조수는 박병욱의 동기인 백현옥이었다. 박병욱은 작품제작이 끝날 무렵에 투입되어 이 일을 도왔다.

1969년 박병욱은 미국계 건설회사(RMK-BRJ)의 베트남 사이공(현재의 호치민) 지사에 2년 계약으로 파견되었다. 건설 사업 기록용 인쇄물 제작 및 삽화 작업을 담당했다. 일을 잘해 계약이 2년 더 연장되었다. 이때 부인인 문길자와 아들 지훈이 베트남으로 합류했다. 1972년에 귀국한 박병욱 가족은 문길자의 사촌으로부터 삼선교의 한옥집을 빌어 살았다.

이때 남부터미널 근방의 육교 위에서 우연히 조각가 최의순(89) 선배를 만났는데 본업인 조각을 하지 않는다고 크게 야단을 맞았다. 심기일전하여 삼선교 집 마당에서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1974년부터 혜화동에서 화실을 운영했다. 이 무렵 1976년에 국회의사당에 설치될 목표로 김세중의 작품 ‘애국애족의 군상’에 조수로 참여했다. 1975년 국전에 향(向)을 출품했다. 돈이 없어 석고로 제작하기로 했다. 일단 흙으로 조각을 빚었다. 흙이 마르지 않게 비닐로 덮어놓고 다음 날 돌아와서 작업을 계속해야 했는데 하루는 신기하게도 흙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석고작품은 혜화동 화실 2층의 좁은 복도를 겨우 통과하여 내려와선 출품 장소인 덕수궁에 마감시간인 5시를 넘겨 8시에 도착했다. 마침 덕수궁 후문이 열려 있어 출품장소 한구석에 억지로 밀어 넣고 나왔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이 작품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듬해에 원주 상지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원주의 시골 냄새가 좋았다. 학생들과 함께 들판에 나가서 메뚜기를 잡아서 볶아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주말부부 생활이 힘들었다. 3년이 채 못되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뇌졸중으로 오른손 못 쓰자 왼손 작업

서울예고 강사 시절의 조각가 박병욱(맨 왼쪽), 스승 최만린(왼쪽에서 두번째)과 학생들과 함께. [사진 박병욱 유족]

서울예고 강사 시절의 조각가 박병욱(맨 왼쪽), 스승 최만린(왼쪽에서 두번째)과 학생들과 함께. [사진 박병욱 유족]

1980년 조각가 최만린이 부산 연지동 LG 연암기념관에 들어갈 길이 30m에 이르는 청동 부조작품을 맡았다. 제작에 박병욱이 참여했다. 일이 끝나자 최만린은 박병욱이 받아야 할 돈으로 자신의 정릉 집을 구입할 것을 제안했다. 받을 돈은 집값의 반밖에 되질 않았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자신의 집이 생겼다. 나머지 돈은 천천히 갚아나갔다. 마당에 커다란 엄나무가 있어 봄이 되면 새순을 따다 튀겨먹었다. 나중에 구파발 작업장을 만들기 전까지 정릉집 아틀리에에서 독립기념관의 안중근 동상 등 많은 작업을 했다. 최만린은 옛집 근처에다 큰 집을 새로 구했다. 그 큰 집은 현재의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이다.

박병욱은 주로 인체를 모티브로 하는 구상조각가다. 그의 인체는 완전한 누드가 아니다. 대부분은 옷을 살짝 걸친 형태다. 젊을 때는 작품을 놓아들 곳이 없어서 처갓집에다 맡기곤 했다. 맡긴 작품은 사각의 틀 안에 선 완전 누드의 젊은 여자가 틀을 부수어버릴 듯 힘껏 양팔을 뻗는 역동적인 작품이었다. 장모는 벗은 여자의 형태가 민망했든지 아니면 추워 보였든지 자꾸만 조각상의 여체 위에 옷을 입혔다.

박병욱은 추상적인 기질을 가진 구상조각가였다. 인체의 구조적 본질을 추출(abstract)하는 작업을 했다. 인체의 동작과 표정이 완성을 이루는 최단거리를 추출하기 위해 기하학적 엄정함을 수반했다. 그의 시대는 추상조각이 대세를 이루었다. 박병욱의 작업에서 추상적 사유 방식을 읽어내는 데에 세상의 눈이 무심했다.

1996년 뇌졸중이 왔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후배 조각가 박충흠(77)이 서울대병원으로 찾아와 휠체어를 밀어주며 옛 노래를 함께 불러주었다. 젊은 날, 연애 시절 문길자가 함춘원 옆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그 소리 높도다’하고 놀리며 불렀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듬해부터는 왼손으로 파피에 마세(지점토)작업을 했다. 2010년에 몰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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