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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인혜의 미술로 한걸음

한국의 전통 건축을 사랑한 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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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인혜 미술사가

김인혜 미술사가

요즘 미술 애호가에게는 ‘갓벽(완벽)’의 나날이다. 프리즈에 맞춰 좋은 전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어느 전시를 봐야 하나, 행복한 고민에 빠지다가 생각해본다. ‘그냥 다 보면 되지.’ 그중 ‘도널드 저드(1928~94)’의 전시를 소개하려 한다. 저드가 워낙 중요한 작가인 데다, 그와 한국의 인연이 남달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사물의 본체 탐구한 작가 저드
1946년 방한, 우리 문화에 빠져
윤형근 작가와도 각별한 인연
한지에 찍은 판화 처음 선보여

 도널드 저드, 무제, 1992-93_2020, 한지에 목판 채색, 20점 세트, 각 60x80cm ⓒJudd Foundation, ARS New York, 사진_Timothy Doyon.

도널드 저드, 무제, 1992-93_2020, 한지에 목판 채색, 20점 세트, 각 60x80cm ⓒJudd Foundation, ARS New York, 사진_Timothy Doyon.

저드는 1960년대 미국 ‘미니멀리즘’을 주도했던 작가다. 이때 ‘미니멀리즘’이란 형태와 색채 같은 회화 요소를 최소한으로 단순화한 양식이라고만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그건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저드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했다. 저드가 보기에, 이전의 회화가 가진 ‘환영(illusion)’의 세계는 ‘실재’와 오히려 동떨어져 있다. 실재하는 것은, 회화의 경우 캔버스라는 천과 나무로 된 틀, 그리고 그것이 놓인 ‘공간’일 뿐이다. 이 생각을 진전시켜나가다가 그는 평면이 아닌 입체, 즉 오브제의 물성(物性) 자체에 주목했다. 오브제의 형, 색, 재질, 그것이 놓인 위치와 공간, 그 공간의 크기와 밀도, 주변의 빛과 공기, 그것들과 오브제의 상호작용 같은 것이 예술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됐다. 저드는 단순히 양식 따위를 바꾼 것이 아니라, ‘예술의 정의’ 자체를 뒤흔든 혁명적 예술가였다.

미국 텍사스 마르파 스튜디오에 포즈를 취한 저드, 1993 ⓒJudd Foundation, ARS New York 사진 Laura Wilson.

미국 텍사스 마르파 스튜디오에 포즈를 취한 저드, 1993 ⓒJudd Foundation, ARS New York 사진 Laura Wilson.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미국 텍사스 마르파(Marfa)에 가보면, 그가 꿈꾸었던 세계관이 훨씬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군더더기가 걸러져 나간 사막에서, 선인장과 잡초만이 듬성듬성 자라는 밋밋한 환경에다, 그는 고원지대인 마르파의 지형적 장점을 십분 활용해 소소한 건물을 지었다. 살짝 벽을 더해 바람길을 만들고, 창문을 높여 빛이 들어 오지만 작품 감상을 가능케 하는 식으로! 그의 단순한 건축 구조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고도의 ‘지혜’가 곳곳에 묻어있다. 여기서 저드는 순박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작품을 제작했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삶을 즐겼다. 그는 삶과 작품, 공간과 이를 에워싼 자연을 끌어들이는 데서, 매우 일관된 ‘단순한 지혜’를 추구했다.

저드는 엄청난 양의 지식과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풍부한 경험과 안목을 길렀다. 그런데 그가 생애 처음으로 나가본 외국이 바로 한국이었다. 1946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가난했던 저드는, 군복무를 마치면 미국 정부가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군대에 자원했고, 미군정 체제의 남한에 배속됐다. 그가 주로 한 일은 김포공항 건설 현장 감독! 17개월간 체류하면서 저드는 한국 풍경과 건축에 매료됐다. “초가지붕이나 검정 기와, 토담이 특징적인 한국의 아름다운 옛 마을들은 조용히 땅에 누워 땅과 비슷한 모양새를 띤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의 질서에 고요히 순응하며, 최소한의 인공을 더한 한국 건축의 미학을 그는 사랑했다. 어쩐지 마르파의 건축미학과 통하는 바가 있지 않나.

1993년 뉴욕 소호에 있는 도널드 저드의 갤러리에서 만난 윤형근(왼쪽)과 저드. [사진 김인혜}

1993년 뉴욕 소호에 있는 도널드 저드의 갤러리에서 만난 윤형근(왼쪽)과 저드. [사진 김인혜}

1991년 저드는 45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왔다. 더 이상 가난한 공병대가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가 되어서. 이때 저드는 급변한 서울의 아파트 건축에 엄청나게 실망했지만, 몇 가지 흡족한 경험을 했다. 그 하나가 화가 윤형근을 만난 일이었다. 동갑내기 두 거장은 서로의 내공을 첫눈에 알아봤다. 윤형근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저드가 그에게 물었다. “예술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충청도 양반 윤형근이 한참 있다가 한마디 했다. “예술은 심심한거여.” ‘심심하다’는 시간적으로 말하면 ‘지루하다’는 것, 같은 시간도 길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또한 맛으로 설명하면 ‘심심하다’는, 맵고 짜고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데에 그 맛이 있다는 의미이다. 윤형근의 ‘심심한’ 예술은 저드의 ‘밋밋한’ 예술과 묘하게도 통했다. 저드는 즉석에서 윤형근의 작품을 3점 구입했고, 그의 개인전을 마르파와 뉴욕에서 열도록 주선했다.

또한 저드는 조선 종이에 반했다. 한지의 독특한 물성, 나무껍질의 결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거친 표면과 질긴 생명력의 가치를 그는 단박에 알아봤다. 저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한지에 판화작업을 시도했다. 한지의 거친 물성이 판화 욕구를 불러일으켰지만, 이 작업은 생각 외로 쉽지 않았다. 1992~93년 작업에 매달렸으나 만족한 결과를 내지 못한 채, 그는 1994년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들 플래빈이 운영하는 재단에서는 도널드 저드의 꿈을 실현하고자 이 오래된 한지를 27년 만에 다시 꺼냈다. 그러고는 판화에 용이한 방식으로 한지를 재가공했고, 2020년 드디어 판을 찍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판화 세트 20점이 지금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에 한국 최초로 전시되고 있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여기부터 한 걸음!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