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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파트는 미끄럼틀?...문화재가 만든 들쑥날쑥 스카이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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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시가 재건축을 승인한 서울 강동구 천호동 A1-2지구 투시도. 좌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은 최저 7층이지만,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이 아닌 가운데는 최고 40층이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가 재건축을 승인한 서울 강동구 천호동 A1-2지구 투시도. 좌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은 최저 7층이지만,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이 아닌 가운데는 최고 40층이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가 지난 4월 재건축을 확정한 서울 강동구 천호동 A1-2구역은 단지 내 아파트 배치 계획이 다소 특이하다. 천호대로 방향 남서쪽 2개 동은 계단처럼 7층→10층→13층으로 짓는다. 그 바로 뒷동은 최고 40층으로 갑자기 훅 치솟는다.

780세대 규모 아파트 높이가 이렇게 들쑥날쑥한 건 해당 부지가 천호대로를 사이에 두고 풍납토성과 인접해서다. 풍납토성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1호다.

사적 등 문화재가 있으면 문화재청장은 문화재보호구역을 지정하고, 여기서부터 동그랗게 원을 그려 인근 100m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묶는다. 천호동 A1-2구역은 전체 사업지의 30%가량만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이 되면서 독특한 건축 계획이 나왔다.

문화재 앙각 규정 논란

서울시 문화재 보호 조례상 앙각 규정. 그래픽=김영옥 기자

서울시 문화재 보호 조례상 앙각 규정. 그래픽=김영옥 기자

서울시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관련 조례를 만들어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건축물 높이를 제한한다. 구체적으로 문화재와 경계 지점에서 앙각(仰角·올려본 각도) 27˚ 선 이내로만 건축물을 올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풍납토성 7.5m 높이에서 27˚를 올려다봤을 때, 사방 100m 안에는 건축물이 보이면 안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풍납토성과 인접한 동은 7~13층으로 배치했다. 한데 이렇게 낮게 배치하면 재건축을 할 때 사업성이 떨어진다. 대신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 포함하지 않은 다른 건물 층수를 올릴 수밖에 없다. 이에 서울시는 최고층수를 기존 35층에서 40층으로 완화하고, 들쑥날쑥한 고층 건물 배치 계획을 허용했다.

미끄럼틀처럼 생긴 외관으로 유명한 송파구 풍납동 씨티극동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이 아파트 101동 11·12호 라인은 9층에서 시작해서, 풍납토성에서 멀어질수록 차근차근 층수가 올라간다. 사선으로 잘린 것 같은 단면 디자인을 적용한 이유가 바로 문화재 앙각 규정 때문이다.

자치구, 권한쟁의 심판 청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한 씨티극동아파트. 문화재 앙각 규정 때문에 지붕을 사선으로 배치해 이른바 미끄럼틀 아파트로 불린다. 문희철 기자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한 씨티극동아파트. 문화재 앙각 규정 때문에 지붕을 사선으로 배치해 이른바 미끄럼틀 아파트로 불린다. 문희철 기자

송파구 관계자는 “‘풍납동 미래도시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문화재 규제를 모두 해제하고 대규모 아파트를 조성해야 한다고 문화재청에 정식으로 건의했지만, 문화재청은 합당한 이유 없이 구청장 면담을 거부하고 송파구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송파구는 문화재 관련 규제가 고유의 자치사무를 침해했다며 지난 3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주민 재산권을 제한하는 법이 많은데, 문화재청만 지자체 권한을 침해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며 “이르면 연말 헌재 판결이 날 때까지 지켜볼 문제”라고 반박했다.

서울시는 예전부터 앙각 규정에 따른 고충을 호소했다. 서울시가 신청사 건립을 추진했던 2006년 서울시청 설계안이 나올 때마다 문화재위원회는 덕수궁 경관을 해칠 수 있다며 설계 보완을 요구했다. 애초 계획했던 19층~22층이 아닌 13층짜리 신청사가 들어선 배경이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서울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여서 문화재가 많이 매장돼 있다”라며 “무 자르듯 정답은 없지만, 문화재 보존과 도시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선 양측이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고 합의를 해나가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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