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생명 진화와 닮은 기술 진화…‘새롭게, 더 새롭게’를 찾아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뉴턴 이전의 사람들은 천체의 다양하고 복잡한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어 신의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명쾌한 과학적 논리로 그 다양한 현상을 해석해냈고, 과학혁명의 문을 열었다. 뉴턴의 진정한 기여는 신의 계시 대신 검증 가능한 과학적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힌 데 있다.

천재보다 ‘수많은 질문’이 중요
시장이 선택한 것만 살아남아
‘거인의 어깨 위’에 섰다는 뉴턴
혁신기술은 작은 변화의 축적

그에 못지않게 인간의 눈을 뜨게 한 인물로는 다윈이 꼽힌다. 그 이유도 비슷하다. 다윈 이전 사람들은 거대한 고래에서 작은 꿀벌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다양한 생물상을 보고 신비로운 신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다윈이 쓴 『종의 기원』(1859)도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생물의 다양함에 대한 경외감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의 기여는 그 놀라운 다양성을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단순한 과학적 논리로 설명한 데 있다. 다윈을 추종했던 토머스 헉슬리는 『종의 기원』 초판을 읽고, “이런 간단한 생각을 어리석게도 왜 하지 못했을까”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아마존서 파는 주방용품 6400만종

찰스 다윈이 그린 ‘생명의 나무’. 생물 종다양성은 신의 의지가 아닌 자연 선택의 결과임을 알렸다. [중앙포토]

찰스 다윈이 그린 ‘생명의 나무’. 생물 종다양성은 신의 의지가 아닌 자연 선택의 결과임을 알렸다. [중앙포토]

뉴턴이나 다윈은 모두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에 관해 설명하기 어려운 신의 숨결 대신 단순하고 검증 가능한 과학적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사고 범위를 넓혔다. 그 덕분에 인간이 광활한 우주로 나갈 꿈을 꾸고, 생명의 비밀을 탐구하면서 현대문명을 열어갈 수 있었다. 과학적 논리로 설명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정당한 자리가 더 높고 다른 차원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종의 기원’과 ‘기술의 기원’

이 세상에는 수많은 별만큼, 그리고 갖가지 생물만큼이나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 바로 그것인데, 다양하기로나 신기하기로는 천체나 생물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스마트폰은 말할 것도 없고, 챗GPT·첨단신약 등 혁신적 기술과 제품이 하루가 멀다고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신기술의 대표 지표인 특허를 보더라도 2021년 한 해에만 전 세계에서 340만 건, 우리나라에서만도 24만 건이 출원되었을 정도다. 이런 기술로 만들어지는 제품은 더 다양하다.

뉴턴과 다윈 이전 사람들이 신의 생각에 기대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다양함과 놀라운 발전속도에 압도된 사람들은 흔히 번득이는 천재의 창의력을 떠올린다. 과거 신의 자리에 천재를 올려놓은 것과 같다. 에디슨이 축음기(1877)와 백열등(1879)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발명품을 쏟아낼 때 사람들은 그의 연구실이 있던 동네 이름을 따서 ‘멘로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1955년 사망 후에 그의 뇌를 240조각으로 나누어 분석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서점가에서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의 전기가 잘 팔리는데, 새로운 기술의 탄생 비밀을 천재의 창의성에서 찾고자 하는 갈망이 여전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신의 계시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천재의 창조적 마인드도 속내를 알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현미경으로 아무리 들여다본들 천재의 비밀이 숨어있을 리 없다. 별과 생물의 다양함을 이해하는 데 신의 역할을 덜어냈던 것처럼, 기술의 다양함과 놀라운 진화 패턴을 이해하는 데서 천재의 창의성이라는 신비로운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종의 기원’에 필적하는 ‘기술의 기원’이 나와야 한다.

기술 탄생의 동력은 ‘의지의 손’

‘종의 기원’은 바로 이 점에서 기술진화에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놀랍게도 기술은 생물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수많은 대안적 기술이 변종처럼 등장하고, 그중에서 인간사회 혹은 시장이 선택하는 것만 살아남는다. 후속기술은 살아남은 기술의 지식을 활용해서 다시 여러 가지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조금씩 변이를 축적하면서 새로운 기술 종으로 분화해나간다. 뉴턴이 인용했다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선다’는 표현 그대로다.

그러나 기술진화는 생물 진화와 결정적으로 한 가지 점에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바로 인간의 의도와 상상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생물의 변이는 유전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탄생한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변이는 반드시 지금과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인간의 의도가 있어야 시작한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관행과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최초의 질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윈은 자연이 장구한 시간 동안 작은 변이를 축적함으로써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뜻에서 ‘시간의 손(hand of time)’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기술의 탄생에는 인간의 비전과 꿈을 담은 ‘의지의 손(hand of will)’이 더 중요하다. ‘기술의 기원’은 생물 진화의 논리에 인간의 의지가 갖는 역할을 더하여 혁신기술의 탄생 비밀을 검증 가능한 과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업가가 오늘도 혁신적 기술을 갈망한다. 언제 떠오를지 모르는 기가 막힌 인사이트를 기다리거나,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천재를 찾아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매일 작게나마 다르게 해보자는 의지로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작은 변화를 치열하게 축적해간다면 천재가 아닌 그 누구라도 세상을 놀라게 할 혁신적인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