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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도 중력 있다, 사람 끌어당기는 힘은 진정성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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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호 16면

영원한 현역 ‘낭만가객’ 최백호

최백호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읽고 본 책과 만화·영화가 내 창작의 원형이다. 보고 들은 것만 쓰기 때문에 내 노래에는 거짓말이 없다”며 활짝 웃었다. 박종근 기자

최백호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읽고 본 책과 만화·영화가 내 창작의 원형이다. 보고 들은 것만 쓰기 때문에 내 노래에는 거짓말이 없다”며 활짝 웃었다. 박종근 기자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 아니라 서울 여의도의 매리어트호텔 커피숍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낭만가객’ 최백호 선생은 흰색 옷을 입고 나왔는데 은은한 백발과 썩 잘 어울렸다.

그는 중장년층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군대 가는 친구를 위해 그 시절 우리는 목놓아 ‘입영전야’를 불렀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영일만 친구’ ‘낭만에 대하여’는 또 어떠한가.

칠순을 훌쩍 넘긴 그는 여전히 왕성한 현역이다. 최근 신곡 ‘찰나’를 발표했다. SBS 라디오 심야 프로 ‘낭만시대’를 16년째 진행하고 있다. 2012년에 낸 앨범 ‘다시 길 위에서’는 재즈와 월드뮤직 어법을 빌려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고, 이후 후배 가수들과의 콜라보가 이어졌다. ‘입영전야’를 모르는 2030 세대도 ‘부산에 가면’은 흥얼거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개인전을 일곱 번 연 화가이면서, 올해 초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숲)라는 산문집도 낸 그는 “칠십이 참 좋은 나이”라며 “세상이 보이고,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계산도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책 내용을 중심으로 낭만과 추억, 인생의 오묘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래도 대화, 매번 같으면 재미없어

‘노래에도 중력이 있다. 내 노래 중력의 정체는 진정성이다’고 쓰셨는데요.
“저는 책을 많이 읽고, 영화와 만화도 많이 봅니다. 내가 읽고 보고 느낀 것을 써 왔기 때문에 제 노래에는 거짓말이 없어요. 사람들이 못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정성 있는 노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 중력의 정체를 알게 되면 히트곡이 많이 나오겠죠. 하하.”
목소리가 미성보다 탁성에 가까운데요.
“제 목소리가 원래 좀 허스키한 데다 젊은 시절 노래한답시고 하도 고함을 질러서 이렇게 됐어요. 얼마 전 목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성대가 평소에도 조금 열려 있는 상태라 건강에 안 좋다. 주사를 놓아서 막아버리면 목소리가 굉장히 곱게 바뀐다’고 하기에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웃음). ‘노래 할 때마다 음정·박자가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노래도 일종의 대화인데 매번 똑같은 박자와 톤으로 하면 재미없지 않나’고 합니다.”
‘노래에도 운이 있고 사주가 있다’고 하셨어요. ‘낭만에 대하여’가 딱 그 케이스죠.
“1994년에 발표했는데 1년 반 동안 전혀 뜨지 않았어요. 작가 김수현 선생님이 차에 타서 라디오를 켰는데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대목이 나오더랍니다. ‘야, 이건 뭐지?’ 싶어서 다음날 PD에게 알아보게 한 뒤에 당시 화제작이었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 선생님한테 부르게 한 겁니다. 그때부터 대박이 난 거죠. 탤런트 강부자 선생님 통해 저녁 자리를 마련해 ‘선생님이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는 그저 그런 가수로 늙어갔을 겁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드렸죠.”
최백호에게 낭만은 무엇입니까.
“젊은 시절 친구들과 막걸리집에서 독재 정권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첫사랑에 실패해 가슴 아프고, 뭐 이런 게 낭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이가 좀 더 들어보니까 젊음이라는 자체가 몽땅 다 낭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정 시간, 기억에 남을 일들만이 아니고요. 아픔도 슬픔도 추억도 다 낭만인 거죠.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칠십만 넘겨라. 어떤 힘든 시간도 견뎌내면 큰 자산이 된다’고 얘기합니다.”
무대에서 열창하는 최백호. 그는 “연주인이 대접받는 풍토가 돼야 한다”고 했다. [사진 최백호]

무대에서 열창하는 최백호. 그는 “연주인이 대접받는 풍토가 돼야 한다”고 했다. [사진 최백호]

최백호는 해운대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경남 좌천 출생이다. 부산 부전동에 있었던 항도고등학교(현 가야고)까지 열차 통학을 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스무 살 때 어머니를 잃은 뒤 꿈을 접고 음악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례식 동안에는 눈물 한 방울 안 났어요. 화장장에서 관이 화구에 들어가는 순간 울음이 터져서 사흘 내내 울었죠. 어머니가 재직하시던 학교 사택에 벚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거기 올라가서 자다가 ‘동명(아명)아, 밥 묵어라’ 하시는 엄마 소리 듣고 뛰어 내려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그 벚나무이지 싶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헤어진 연인이 아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라지요.
“어머니가 1970년 10월 중순에 가셨는데 장례 치르고 노트에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이렇게 끄적여 놨어요. 나중에 서울 올라와 작곡가 최종혁 선생님 만나서 노랫말을 완성한 뒤에 곡을 받았죠.”

우리도 노랫말로 노벨상 받았으면

‘영일만 친구’는 돌아가신 친구와 함께 만든 곡이라고 들었습니다.
“홍수진이라는 친구인데 울산MBC 편성부장을 했어요. 바닷가에서 카페도 하고 시와 그림에도 능했어요. 제대하고 거의 노숙자처럼 살 때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 외국 음악 들려주면서 잘 될 거라고 격려도 해 줬어요. 홍수진, 저, 소설 쓰는 친구 이렇게 셋이서 포항의 지하 술집에서 가사를 만들고 곡은 제가 붙였죠.”
‘애비’라는 곡은 시집가는 딸에게 불러주는 노래죠.
“딸이 다섯 살 때 너무 귀여워서 ‘이거 우째 시집보내노’ 하는 마음에 지은 곡인데, ‘낭만에 대하여’가 뜨면서 뒤늦게 빛을 봤죠. 딸 시집보내는 지인이 하도 부탁해서 예식장에서 불렀는데 이 친구가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1절만 부르고 말았어요(웃음). 우리 딸은 시집가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죠.”
작사가 이건우 선생이 저와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작사가는 나훈아”라고 하셨는데요.
“100% 동의합니다. 제 프로에서 나훈아 선생님 곡을 자주 트는데요. 들을 때마다 감탄이 나와요. ‘홍시’ 같은 곡은 절창입니다. ‘혹시 뒤에서 가사를 써 주는 사람이 있나’ 하고 한때 의심했을 정도니까요. 좋은 노랫말은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듭니다. 우리도 미국의 밥 딜런 같은 가수가 나와서 노랫말로 노벨상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최근까지 다섯 개 조간신문을 구독했다는 최백호 선생은 시사에 밝고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다. 대한민국 골프장 1번 홀에만 있는 ‘일파만파’(한 사람이 파를 하면 모두 파로 적어주는 것)에도 질색을 한다. 작은 거짓이 버젓이 통하는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불후의 명곡을 남기지는 못해도,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래하고 좋은 노래도 만들면서 살고 싶습니다.” 낭만가객의 소망이다.

허름한 다방서 몰래 팔던 도라지 위스키…50여년 전 그때 그 추억

최백호 선생이 ‘낭만에 대하여’ 가사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이 스토리를 알고 노래를 부르면 감정이 팍팍 잡히지 않을까.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지금은 없어진, 동래시장 올라가는 중간에 있던 허름한 다방. 제대한 다음해 72년 봄, 비가 많이 와서 다방에 들어갔다.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LP판으로 음악을 들었고 단골이 됐다.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몰래 팔았다. 위티(위스키+티)라고 했다. 홍차 한 잔에 작은 스트레이트 잔으로 위스키를 줬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주머니가 넉넉한 동네 어르신이 위티를 주문하면 마담이 와서 앉았다. 돈 없는 청춘은 커피 시키면 옆에 앉는 레지(여종업원)와 실없는 농담을 나눴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청춘의 모든 것들은 그때는 쓰라리고 아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너무나 달콤하고 그립다. 본인이 써 놓고도 감탄한 대목.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부산~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이 정박하는 부산 3부두. 장발의 멋진 일본 친구가 자전거 여행 왔다가 크게 다쳐서 친구 병실에 같이 입원했고, 친해졌다. 그가 떠나면서 펑펑 우는 걸 기억하며 쓴 가사.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미술학원 다닐 때 만난 친구 여친의 친구. 딸기밭에 같이 가서 첫눈에 반해 1년 정도 사귀었다. 시집가서 부산 광안리에서 약국 하면서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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