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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간토 학살 100년, 한·일 새 시대 걸맞은 역사 직시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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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의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8월 1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진상 공개와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의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8월 1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진상 공개와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유언비어 퍼지며 재일동포 6000여 명 피살돼

과거 사실 인정, 사과해야 진정한 미래동반자

정확히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와중에 재일동포들이 대규모로 학살됐다. 6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비극적 학살 사건이 오늘 100주년을 맞았는데도,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지금껏 사실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어 매우 유감스럽다. 재일교포들의 각종 증언뿐 아니라 양심적 일본인들의 고백 등을 토대로 진행한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간토 학살 사건은 규모 7.9의 대지진 비극 와중에 벌어졌다. 한순간에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약 200만 명이 살던 집을 잃으면서 극심한 사회 혼란에 빠져들자 일본 정부는 계엄령까지 발동했다.

그 과정에서 내무성은 일선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조선인이 사회주의자와 결탁해 방화·테러·강도 등을 획책하니 주의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일본인들이 조직한 자경단(自警團)은 적개심을 품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살해했다. 신분을 숨기려고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을 가려내기 위해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 경찰은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을 내세워 자경단의 만행을 알고도 묵인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격자들이 간토 학살을 증언해도 일본 정부는 진실을 외면하거나 부인하고 있다. 그제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 관련 질문을 받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올해 일본 문부과학성 검증을 통과한 초등학교 3~6학년 교과서에서도 간토 조선인 학살 기술이 삭제됐다.

간토 학살 100주년을 맞아 사상 처음 한일의원연맹 소속 양국 국회의원들이 오늘 도쿄에서 열리는 추념식에 참석하고, 간토 학살을 다룬 일본인 감독의 영화 ‘후쿠다무라(福田村) 사건’도 개봉된다. 국제 학술심포지엄이 열릴 정도로 진실을 규명하려는 열기가 뜨겁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1절과 8·15 광복절에 일본을 파트너로 인정하겠다는 전향적 메시지를  발신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호응으로 한·일 관계는 정상화 궤도로 빠르게 복귀하고 있다. 하지만 선린우호 관계가 더 튼실하게 뿌리 내리려면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태도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 외교부는 간토 학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역사 인정과 사과를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일본 역시 100주년을 계기로 과거사를 직시하는 용기 있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양국은 진정한 미래 동반자로서 함께 전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