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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명 모른채 떠난 첫째…'이건희 프로젝트' 덕에 엄마는 둘째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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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29일 진료를 받으러 온 시민들로 북적인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김종호 기자

지난 29일 진료를 받으러 온 시민들로 북적인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김종호 기자

“둘째를 가질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초등학교 교사 김모(32)씨의 목소리에는 회한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첫아이 솔이(가명)를 잃은 아픔이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다. 한편으로는 둘째가 찾아올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김씨는 2021년 4월 솔이를 먼저 보냈다.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 됐을 때다. 솔이를 가졌을 때 일반적인 산전 검사에다 고위험 산모가 하는 정밀검사까지 했다.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이는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로 이송돼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뇌·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손발이 기형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손을 잡고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솔이는 그렇게 떠났다. 병명도 모른 채 출산 전후 다섯 군데의 병원을 돌았지만 허사였다. 검사비로 400만원가량 들었다.

임상전문가·생명과학자 등 팀으로 활동

서울대병원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DNA를 정제·추출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서울대병원 분자진단검사실에서 연구원이 DNA를 정제·추출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유전자 변이를 찾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솔이가 떠나기 한 달여 전 추진했던 유전자 검사의 결과였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솔이와 김씨 부부의 혈액, 추가로 채취한 양가 조부모 혈액 등 7명의 유전자를 샅샅이 뒤져 1년8개월여 만에 문제의 유전자 결실(일부가 빠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병명은 ‘뇌량 무형성증 및 뇌이랑비대증’이었다. 채종희(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울대병원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 희귀질환사업부장은 놀라는 김씨에게 “이제 둘째를 가지는 게 어떠냐. 착상 전 검사, 산전 검사를 해서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겠다”고 설득했다.

채 교수 제안을 받기 전까지 김씨는 솔이를 보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버텼는데, 갑자기 솔이를 보내자 할 일이 없어졌다. 솔이를 보낸 이유조차 모르는데, 또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조차 안 했다. 대신 임용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지난해 11월 이후 김씨의 삶은 달라졌다. 몸만들기에 집중했고, 올 초엔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지금은 임신을 시도하고 있다. 임신이 확인되면 채 교수에게 달려갈 예정이다.

김씨의 희망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기부금에서 시작됐다. 이 전 회장 유족은 2021년 5월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기금으로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했다. 병원 측은 소아희귀질환 진단연구팀을 꾸렸고, 솔이 사례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채 교수는 “솔이와 같은 희귀질환은 세계에서 10여 명에 불과하다”며 “유전자를 대규모로 분석하고, 알고리즘을 개발해 외국 것과 결합하는 등 정말 어렵게 찾았다”고 했다.

소아과 임상 의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전자 분석 경험이 풍부한 임상전문가, 바이오 정보 처리 전문가, 다양한 검사법의 한계를 잘 아는 진단검사의학 전문가, 유전자 기능에 정통한 생명과학자 등이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트리오 엑솜 검사(유전자 통째 검사)가 기본이다. 부모·조부모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하고, 여기에서 소아 환자의 변이가 왔는지를 찾아간다. 6개월가량 걸리고 500만~1000만원이 들어간다. 솔이는 더 오래 걸려 1000만원 넘게 들어갔다. 건강보험 적용은 안 된다.

서울대병원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삼성서울·경북대·양산부산대·전남대·충남대 등 전국 어린이병원 16곳과 함께 병명조차 모르는 환자 737명과 보호자 1422명의 유전자를 검사했다. 이 중 환자 424명, 보호자 810명의 결과가 나왔고, 150명의 원인을 밝혔다. 솔이 사례도 이 중 하나다. 150명 중 4~5명만 같은 병이고, 나머지는 다 다르다. 바라이서-윈터 증후군(Baraitser-Winter syndrome), 아르볼레다-탐 증후군(Arboleda-Tham syndrome), 보쉬-분스트라-샤프 시신경위축 증후군(Bosch-Boonstra-Schaaf optic atrophy syndrome) 등이다. 복잡한 이름만 봐도 희귀병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다.

상당수는 한국에서 처음 발견됐다. 유전자 변이가 뭔지를 찾는 데 10년 넘게 걸리기도 하고, 못 찾는 경우도 있다. 희귀병 아이 부모들은 이런 과정을 ‘진단 방랑’이라고 표현한다. 150명 환자가 ‘방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부모들은 원인을 알게 된 것에 우선 안도한다. 의료진은 다음 단계로 치료법 탐구에 들어간다.

‘진단 방랑’ 변이 찾는 데 10년 걸리기도

이진숙 서울대병원 소아희귀질환사업부 진료교수는 “트리오 엑솜 검사에서 답을 찾을 확률이 30~40%인데, 답을 못 찾았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세포연구·동물연구를 계속하는데, 이 과정에는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며 “필요할 경우 전국의 제브라피시(잉어과 어류)·초파리 전문가 등과도 협업한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소아암 분야 42건, 희귀질환 19건, 공동연구 105건이 진행된다. 100개 의료기관, 1059명의 의료진이 달라붙어 있다.

채종희 교수는 “이 모든 게 기부금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未)진단 희귀질환 분야에서 한국이 글로벌 임상 연구의 중심이 될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엄마가 될 꿈을 다시 꾸게 된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다시 갖는다는 게 무서웠는데 이 전 회장님과 의료진이 희망을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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