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호남에 던진 과제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 한 달-. 지난 28일 문제의 잼버리 야영장터를 돌아봤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전북 부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여를 달리니 새만금 간척지다. 884만㎡의 광활한 간척지, 미처 치우지 못해 나뒹구는 쓰레기 더미와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웠던 그늘막만이 잼버리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제멋대로 자란 잡풀과 진흙으로 뒤덮여 황량했다. 섭씨 25도, 비바람까지 흩뿌려 제법 서늘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동차 문을 열자 후끈한 찜통 열기가 기습했다. 택시기사는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덥고 습도도 훨씬 높다. 36~37도 한여름 땡볕에 끈적한 습기까지 차올랐으니 어땠겠냐”며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의문의 첫 단추가 풀렸다. 야영장으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도,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견제 시스템의 부재, 뿌리 깊은 무비판의 관성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전북을 희생양 만들어선 안 돼”
“새만금 지키자”는 목소리 부상
스마트팜, 민주당 반대로 무산
“권력교체 없는 일당 독식 탓 커”
“전북도민 총궐기 상황 올지도 …”
전북도청에 이어 부안군청에도 감사원 감사반이 들이닥치면서 지역 정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전북 14개 시·군의회 의장 연명으로 “전북도에 책임을 지우는 감사나 감찰이 돼선 안 된다”는 성명이 나왔다. 호남 정치의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은 며칠 전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잼버리를 두고 예산 잿밥이란 표현을 쓴 걸 보고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잼버리 실패로 전북도를 희생양 만들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전북도민이 총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책임론 막아내고 새만금 지키기’가 전북과 호남 정치권의 새로운 어젠다로 급부상 중이다.
거리에서 만난 군민들 대다수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60대 이모씨는 “전북이 뭔 잘못이여? 1000원 내려올 걸 500~600원 내려보내고 잘 치르라고 하니 그런 것이제. 물론 여기도 잘못된 게 있겄지만 현 정권이 문제지, 꺼떡하면 구 정권만 갖고 물어징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씨도 “현 정부가 잘했어야지 왜 자꾸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못했다고 핑계를 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외국인들이야 왔다 가면 그만이고, 천막도 거둬가 버리면 끝이제. 식당이나 좀 됐을까, 원래부터 잼버리는 군민들과 무관해요”라면서 “그라나도(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데 이번 일로 부안에 대한 이미지만 더 버려부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자유전 농지법이 외려 농민에 고통”
식당과 찻집 등 상가가 몰려있는 읍내. 한 식당에서 지역 유지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 공무원 출신인 A씨와 도내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B씨등 일행은 점심 중이었다.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은 내게 명함을 주긴 했지만 기사에 실명 인용되길 원치 않았다.
A=“행사 전부터 저런 뻘밭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하느냐고 걱정이 많았어요. 군민들이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어떻게 하면 대회를 성공시킬 것인가 지역민한테 여론도 들어보고 연구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야 했는데 매사에 소홀했어요. 돈만 갖다 쓸 줄 알았지.”
B=“아침 조기축구회도 50명이 뛰면 화장실이 5, 6개가 필요해요. 4만명이 오는데 350개를 지었대요. 4000개는 지었어야죠. 물도 맑은 물 놔두고 썩은 물을 끌어다 쓰고. 몇 년 전부터 건의가 많았지만 소용없어요. (스카우트 대원들) 철수는 잘한 거예요. 철수 안 했으면 난리 났을 거예요.”
대화가 감사원 감사로 흘렀다. 잼버리 예산뿐 아니라 부안군의 일반회계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군청이 반발한다는 얘기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잼버리 망친 게 윤석열 대통령의 탁상행정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고 시중 여론을 전했다. 그러자 “여기는 민주당, 이재명 욕하면 큰일 나. 비판이 없고 매사 정치적 색깔로 따지니…. 비리도 정의로 둔갑시키잖아”라고 했다. 기초의원부터 국회의원까지 민주당 일색인 일당독식 정치가 호남을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로 퇴보시켰다, 기업 투자가 없어 지역 발전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2016년의 일이다. LG CNC가 새만금에 스마트팜을 조성하려다 농민단체(전국농민회총연맹)와 민주당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LG CNC는 3800억원을 투자해 ICT(정보통신기술)를 바탕으로 스마트팜 설비와 솔루션 개발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수확 농산물은 전량 수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처한 농민들의 상황을 외면한 채 굴지의 대기업이 토마토·파프리카까지 손대면 안 된다”는 민주당 의원들과 전농의 반발로 결국 계획을 접었다. B씨는 열변을 토했다.
“농촌엔 거대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이 주도하면 농민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덴마크를 봐요. 농민 몇만 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잖아요. 농민들 보호한다며 기업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말이 돼요? 노인들 다 돌아가시면 그땐 누가 농사지어요? 민주당이 경자유전(耕者有田) 앞세워 만들어놓은 농지법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땅 거래가 안 되고 투자도 안 되니 농민들이 땅을 팔고 싶어도 팔지도 못하고…. 서울 사람들이 땅 사면 여기 땅이 서울로 가버린답니까?”
“대기업 있었다면 막장 되진 않았을 것”
권력교체 없는 호남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은 ‘영원한 여당’이다. 비(非)민주당 세력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표 참조〉. 정의당 전북도당이 “파행의 원인은 잼버리를 명분 삼아 새만금신공항등 SOC 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며 “10조원 정도의 개발 자금의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정도다.
‘야당’의 빈자리를 대신해 최근 청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지만 새로운 변화다. 이양승 군산대 교수는 권력 교체 없는 호남 정치가 호남을 역선택의 공간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전북 남원 출신인 이 교수는 통화에서 “부패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부패 시스템이 자리 잡은 곳에선 정상적인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혼자만 청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라며 “잼버리 사태는 민주당 독점 체제의 전라도 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분립, 견제와 감시 같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 탓이란 주장이다.
호남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회복하자며 2020년 발족한 ‘호남대안포럼’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주 출신 의사인 박은식 공동 대표는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한다며 스마트팜 무산시키고 소상공인 보호한다며 복합쇼핑몰 입점을 거부했다. 자생적 성장 역량을 갖추게 해주는 기업은 몰아내고 대신 광주형·군산형 일자리,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세금 들어가는 사업만 벌인다. 정치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세금으로 먹고사는 구조를 만드니 지역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견제 세력이 있었다면 잼버리 부지 선정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대기업이 들어와 있었다면 기업이 기반 시설을 해놨을 것이기 때문에 잼버리가 막장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지난 27일 창립총회를 마친 호남대안포럼 전북지회의 신승욱 회장도 30대 청년이다. 그는 “새만금 사업 자금 유치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장소 선정부터 패착이 됐고 전북이 발전은커녕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분명히 자기 반성할 부분이 있는데도 지역감정으로 대응하고 현 정부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러니 호남 혐오를 키우고 양극단의 대립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성역’이 돼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정치가 도구로 징발한 탓이 크다. 보수 세력의 호남 고립 전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호남 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똘똘 뭉쳐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이걸 탓할 순 없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집단의식을 특정 정당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데 악용해온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지역발전과 자치 역량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일당 독식 정치를 공고화하는 데 허비했다. 그 결과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23년 전국 17개 시·도별 재정자립도를 보면 전남(28.7%)과 전북(27.9%)이 최하위다. 6개 광역시 중에선 광주광역시(46.2%)가 꼴찌다. 민주화를 위한 호남의 희생과 헌신에 견주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