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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수년간' 유족 요구대로 다듬었다…뉴욕이 '참사'를 기억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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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9·11 테러는 미국과 미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반세기만에 본토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명분보다 더 큰게 시민들의 상처다. 눈 앞에서 북미 최고 높이의 건물을 비행기가 들이받고, 반나절만에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 허탈감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멀쩡하던 가족과 동료, 친구가 그 안에서 생을 마쳤으니 슬픔은 더했다.

 2011년 가을, 기자는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에서 1년짜리 단기연수를 했다. 마침 테러 10주년을 맞아 '911 메모리얼'(추모공간)이 임시로 개장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메모리얼에서 북쪽으로 네 블록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공사장 가림막만 보일 뿐 기념물은 찾기 힘들었다. 정신없이 한 계절을 보내고 찬바람이 불 무렵 메모리얼에 직접 가보고서야 상황이 이해됐다.

2011년 문을 연 911 메모리얼의 모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연못을 만들고 그 테두리를 둘러싼 동판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적었다. 1만 평의 거대한 땅이 추모공간으로 제공됐고, 참사의 의미와 유족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사진 911 메모리얼 홈페이지

2011년 문을 연 911 메모리얼의 모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연못을 만들고 그 테두리를 둘러싼 동판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적었다. 1만 평의 거대한 땅이 추모공간으로 제공됐고, 참사의 의미와 유족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사진 911 메모리얼 홈페이지

 방문자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소리였다. 주변 소음을 다 잠재우고도 남을 규칙적인 물소리. 그리고 무너진 쌍둥이 빌딩 자리에 위치한 두 개의 사각형 연못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연못 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유족과 미국인의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물은 9m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잠시 고였다 더 작은 사각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분당 1만1400L씩 쏟아부어도 연못은 차지 않는다. 보고만 있어도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연못의 이름은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다.

1만평 부지에 추모공간, 동판 이름도 유족 뜻 고려해 배치 

 테러리스트에게 보란 듯 더 높은 건물을 지을 법도 한데 뉴욕은 다른 선택을 했다. 피해를 본 부지 6만5000㎡(약 2만 평)의 절반을 뚝 떼어 추모용으로 쓰고, 공간 구성은 아래쪽을 지향했다. 무너짐의 의미와 희생자 유족의 슬픔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연못 테두리를 두른 동판에는 테러로 숨진 298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개장에 앞서 유족들에게 희생자 이름 옆에 쓰이길 바라는 다른 희생자 이름을 적어내도록 했다. 죽어서도 친한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한 배려다. 저마다 요구가 다르니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순서를 짜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메모리얼 홈페이지에는 ‘수년간’ 작업했다고 적혀 있다.

 참사 당시 현장에서 발견해 소생시킨 배나무는 ‘생존자 나무(Survivor Tree)’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마다 폭탄 테러나 총기 난사, 허리케인, 산불 등으로 피해를 본 세 곳을 골라 이 나무의 묘목을 보낸다고 한다. 미국 내는 물론이고 노르웨이나 프랑스·그리스·우크라이나 등 전쟁과 테러, 재난을 겪은 외국에도 보냈다. 이렇게 '911 메모리얼'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추모의 상징이 됐다.

 우리 추모 기념물은 접근성 ‘0’

 참사라면 우리도 만만치 않게 겪었다. 그때마다 분노와 추모, 대책 마련 요구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연초에 중앙일보 기획취재팀은 이런 참사를 추모하는 기념물을 취재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다.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강사업본부 정문 앞. 성수대교사고희생자위령비를 도보로 찾아가기 위해선 차선 옆 갓길로 수백미터를 걸어야한다. 석경민 기자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강사업본부 정문 앞. 성수대교사고희생자위령비를 도보로 찾아가기 위해선 차선 옆 갓길로 수백미터를 걸어야한다. 석경민 기자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위령비는 강변북로 사이에 섬처럼 남은 공간에 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시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배짱이 없인 찾아갈 수 없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추모 공간은 현장에서 4㎞ 떨어진 양재의 숲 구석에 마련됐다. ‘땅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밀려난 삼풍 위령비 옆에는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된 대한항공 여객기 희생자 위령탑과 우면산 산사태 위령비도 서 있다. 추모의 의미를 담은 조형미는 고사하고,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서 시나브로 망각의 길을 걷는 참사의 기억이 여럿이다.

이태원 참사도 망각의 길 걸을까 우려

지난해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족은 아직도 서울시청 광장에 분향소를 운영하고 있다. 책임자 처벌과 추모공간 확보를 위한 입법을 요구하고 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입법은 요원하다. 서울시는 사고현장 인근 녹사평역 지하4층에 추모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유족들은 거절했다. 앞선 사례를 그대로 답습한 공간은 추모가 아닌 망각을 위한 것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당국은 이들이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떼를 쓴다는 시각을 숨기지 않는다.

8월 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종교인들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8월 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종교인들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두 달 뒤면 핼러윈이다. 그동안 무엇 하나 진전된 것이 없다. 시간이 흐르며 유족들의 눈물이 마르고, 한때 분노했던 우리의 기억도 말라간다. 격하지만 짧게 애도하고, 한참 갈등한 뒤 결국 망각하는 악순환이 이번에도 되풀이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