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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신진서와 소설 『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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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신진서

신진서

신진서 9단의 응씨배 우승 소식이 신문에 크게 실려 기분이 좋아진 날 아침, 조그만 책 한 권이 배달됐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바둑소설 『명인』(사진)이다. 30년 전 솔출판사에서 처음 냈는데 이번에 민음사에서 또 냈다. 누군가 이런 책을 꾸준히 낸다는 게 신기하다.

명인

명인

소설은 65세 본인방 슈사이 명인과 30세 기타니 7단이 둔 1938년 슈사이 은퇴 바둑 한판이 소재다. 제한시간은 각 40시간으로 사상 최장이다. 명인의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6개월을 끌었다. 대국에 심혼을 쏟아부은 명인은 1년쯤 지난 후 죽음을 맞이한다.

관전기를 맡은 가와바타는 이 과정을 기록하며 66회의 관전기를 연재했고 다시 소설로 완성시켰다.

“여울물 소리 외에 먼 데서 석공의 끌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정원에 핀 참나리 향기가 스며든다. 알 수 없는 새가 대국실의 쥐죽은 듯한 고요에, 처마 끝에서 크게 날아올랐다. 이날은 12의 봉수에서 흑27의 봉수까지 16수 나아갔다.”

“명인은 승부놀이의 아귀 같았다. 승부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대개 다른 승부놀이도 좋아하는 법이지만 명인의 경우는 자세가 남달랐다. 가볍게 즐기는 게 아니었다. 아주 끈질기고 끝이 없었다. 기분 전환이나 지루함을 때우는 게 아니라 승부귀신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듯 섬짓했다.”

65세의 노인이 당대 최강의 젊은 기사를 정선을 접고 둔다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50년 동안 한 판도 지지 않아 ‘불패의 명인’으로 불리는 이 노인은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결과는 5집 패. 소비시간은 명인이 19시간 57분, 기타니(소설에선 오타케) 7단이 34시간 19분.

“명인의 위중한 병환 탓에 이 바둑은 한층 비통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 바둑이 명인의 목숨을 빼앗은 셈이리라.”

소설을 보면 바둑은 예술이고 구도의 세계였다. 삶과 죽음은 그다음이었다. 어찌 보면 바둑이 있는 대로 폼을 잡던 시절의 얘기였다.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옛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든다. 이제는 AI 시대다. 변해도 너무 크게 변했다. AI와의 일치율로 기사의 실력을 판별한다. 일치율이 너무 높으면 치팅 의혹이 뒤따른다. 이제 바둑은 다시는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신진서 9단의 본지 인터뷰를 보니 응씨배 결승 전날 “잠이 안 왔다”는 대목이 있다. 잠이 필요 없는 AI는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승부사라면 누구나 잠들지 못하는 밤의 비밀과 고통을 안다. 다시 한 가닥 기억이 떠오른다. 1회 응씨배 결승 최종국 아침, 대국자들이 입장하는데 앞선 조훈현 9단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 뒤로 녜웨이핑 9단이 걸어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얼굴이 핏기 하나 없는 납인형처럼 잿빛으로 죽어있었다. 누가 더 잠을 못 잤는지 분명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요즘에 와서 승부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바둑의 진정한 자산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AI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약점이 바로 인간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공지능’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진서의 승리는 두려움, 긴장, 동요, 낙관과 비관 등 숱한 감정의 곡선을 줄 타듯 하며 얻어낸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인공지능(AI)한테 배운 것이 많지만 인공지능이 신진서의 마음을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건 오롯이 신진서의 몫이다.

신진서는 “전에는 (내가) AI를 잘 활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기사들이 너무 많아져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수읽기와 후반전은 나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수읽기와 후반전은 AI에게 배우기 어렵다. AI에 파묻혀 살지만 AI로부터 멀리 벗어나 승부하고 싶은 신진서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 길이 신진서도 살고 바둑도 사는 길인지 모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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