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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 '현금 살포' 없다"…내년 예산 657조 긴축모드 [2024 예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내년 임기 3년 차 ‘반환점’에 접어드는 윤석열 정부가 정책 ‘실탄’인 예산을 656조9000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올해 예산(638조7000억원) 대비 지출 증가율이 2.8%(18조2000억원)에 그쳤다. 증가율로 따지면 2005년 이후 19년 만에 가장 낮다. 정부는 ‘긴축 재정’ 기조를 가져가되 ‘선택과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강조했다.

기획재정부가 29일 발표한 ‘2024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예산의 핵심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긴축 재정’이다. 지출 증가율이 ‘확장 재정’을 내건 문재인 정부 시절(2018~2022년) 연평균 증가율(8.7%)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현 정부가 처음 짠 올해 예산 지출 증가율(5.1%)보다도 낮다.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3%대 중반)를 고려하면 사실상 예산 감축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중간 평가’ 국면에 들어섰지만,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하는 의미가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예산안에 대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재정을 지키는 취지”라며 “꼭 필요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려 민생을 챙기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강조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예산안 곳곳에 윤석열 정부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연구개발(R&D)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주문한 R&D 예산은 25조9000억원으로 올해(31조원)보다 16.6% 깎였다.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현금 살포는 하지 않겠다”고 강조한 일자리 예산도 같은 기간 30조3000억원→29조3000억원으로 3.5% 줄였다.

반면 역대 최대 폭 생계급여 인상(13.2%), 육아휴직 기간 12개월→18개월 확대, 만 0세 아동 부모급여 월 70만원→100만원 인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복지 예산은 같은 기간 226조원→242조8000억원으로 7.5% 늘렸다. 정부가 ‘국가의 본질 기능’으로 강조하는 국방 부문은 전력 강화와 간부 처우 개선 등 57조원→59조5000억원으로 4.5% 확대했다.

모든 예산이 이른바 ‘애니씽 벗 문’(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만 아니면 된다’는 의미) 식은 아니었다. 문 정부 시절 크게 늘린 노인 관련과 도로·공항·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늘렸다. 일자리 예산은 줄었지만 노인 일자리 관련 예산은 1조5000억원→2조원, 기초연금 예산은 18조5000억원→20조2000억원으로 각각 확대했다. SOC 예산도 24조9000억원→26조1000억원으로 4.6% 늘렸다.

추경호 부총리는 “노인 인구가 늘어난 측면을 고려했다”며 “과거와 달리 직접 재정을 뿌려 만드는 일자리 대신 민간형 노인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SOC는 사업 주기가 있는데 올해나 내년에 착공하는 사업 등 예산을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이전 정부처럼 재정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게 아니라, 성장률이 낮더라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총선을 앞두고 재정을 투입해 인기를 얻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재정 건전성 측면에서) 미래 세대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다만 과도한 재정 긴축이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고금리 추세로 통화 정책의 여력이 크지 않은데 ‘최후 보루’인 재정 집행마저 줄일 경우 경기 반등이 더딜 수 있어서다. 최근엔 중국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는 등 외부 상황도 불투명하다. 한국은행은 지난 24일 수정 경제전망에서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3%에서 2.2%로 하향 조정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건전한 정부 지출은 소비·투자·일자리를 늘려 경제 성장을 이끄는 버팀목 역할을 한다”며 “긴축 재정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인 만큼, 경기 침체 상황에선 재정을 유연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성장을 북돋는 예산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경제 먹거리인 인공지능(AI)과 반도체·미래차·바이오 등 12대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투자를 올해 4조7000억원에서 내년 5조원으로 6.3% 늘렸다. 반면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기초연구 예산은 6.2% 깎은 2조4000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장은 “민간이 선도하는 반도체·미래차 등 분야와 달리 기초연구는 정부 지원이 절대적”이라며 “당장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없더라도 멀리 봤을 때 기초과학 분야에 꾸준히 투자해야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예산 심의는 지금부터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 심의 과정에서 나올 선심성 예산 증액 요구를 막아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긴축 재정은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경제 성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며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규제 혁신을 이어가면서, 지지부진한 연금·노동·교육 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기재부는 내년 국세 수입(세수)을 올해(400조5000억원) 대비 33조1000억원 줄어든 367조4000억원으로 전망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이 올해보다 1.3%포인트 증가한 3.9%에 달할 전망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같은 기간 50.4%→51%로 늘어난다.

나랏빚을 줄이는 대신 나랏빚 증가 속도를 줄이는 데 만족해야 할 상황이란 얘기다. 예산 지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는데도 불구하고 세수가 부족해 빛이 바랬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 채무 증가 폭을 2019년 이후 가장 낮은 61조8000억원으로 줄이는 등 ‘명분’을 살렸지만, 세수가 부족해 예산 지출을 크게 늘릴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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