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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 죽인 사형수 석방될 뻔…한동훈이 띄운 '가석방 없는 무기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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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추진하고 있다. 1997년 이후 26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잇단 흉기난동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위헌 결정 가능성과 ‘종신형 달성을 위한 사형선고는 타당하지 않다’는 최근 대법원 판례 등도 영향을 미쳤다.

'묻지마 범죄'와 사형제 폐지 '위기'

1992년 10월 여호와의증인 때문에 아내를 종교에 뺏겼다는 원언식(당시 35세)이 여호와의증인 예배당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신도 15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중앙포토.

1992년 10월 여호와의증인 때문에 아내를 종교에 뺏겼다는 원언식(당시 35세)이 여호와의증인 예배당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신도 15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중앙포토.

한동훈 장관은 지난해 9월 사형제의 위헌 여부를 따지는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사형을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 올해 4월 1993년 원주 여호와의증인 왕국회관 방화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된 원언식의 형 집행시효(30년)가 다가오며 논란이 됐다. 사형을 30년간 집행하지 않으면 석방해야 하는데, 올해 11월이면 당시 방화로 15명을 죽인 원언식이 풀려나게 된 것이다. 이에 법무부는 4월 13일 입법예고를 통해 사형제의 집행시효를 없앴다. 가석방 없는 무기형으로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올해 7월 16일 성립한 대법원 판례도 법무부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대법원은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또 수형자를 살해한 이모(28) 피고인 사건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처벌인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사형을 선고한 원심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형을 선고하면 사실상 종신형의 효과를 낸다’는 판결 사유를 댔는데, 대법원이 이런 논리에 제동을 걸며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필요성이 더 커진 것이다.

한동훈 장관은 7월 26일 ‘신림역 칼부림 사건’ 이후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가석방 없는 무기형 관련 법안을 발의하려고 한다”고 하자 한 장관은 “사형제 위헌 여부 결정 이후 유력하게 검토될 수 있는 의미있는 방안”이라고 답했다. 이 즈음 법무부 형사법제과는 법 개정 및 근거 마련 작업을 진행했고, 보름이 조금 넘은 8월 14일에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입법예고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엄벌주의’ 美 49개주 도입…유럽은 “존엄성 침해”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가장 큰 특징은 재심이나 사면 같은 특수한 사정 없이는 가석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현행 무기징역형이 수감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학계에선 헌법재판소가 사형제에 대해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할 경우, 사면을 통해 사형수를 ‘가석방 없는 무기수’로 감형하는 방식도 예상한다.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미국에선 살인 외에도 마약, 아동 성폭력 등의 분야에서 폭넓게 선고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미국 50개주 중 알래스카를 제외한 49개주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고 있다. 이 가운데 27개주는 사형제도 병행한다. 지난해 5월 뉴욕주 버펄로시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10명 사망), 2018년 플로리다주 더글러스 고교 총기난사 사건(17명 사망), 2009년 일리노이주 여아 성폭행 사건 범인 등에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선고됐다.

올해 2월 15일 뉴욕주 이리 카운티 법원에서 지난해 5월 총기난사 사건 피고인인 페이튼 젠드론(가운데)이 테러 및 1급 살인 혐의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AP=연합뉴스

올해 2월 15일 뉴욕주 이리 카운티 법원에서 지난해 5월 총기난사 사건 피고인인 페이튼 젠드론(가운데)이 테러 및 1급 살인 혐의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AP=연합뉴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없다. 법무부에 따르면 프랑스·영국·불가리아 정도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시행한다. 독일의 경우 1949년 사형제를 폐지하고 대체 형벌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했지만 1981년 폐지했다. 1977년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근본적으로 무기수도 자유를 되찾을 권리가 있어야 하며, 사면만으로는 이를 달성하기 부족하다”고 판결했다. 일본은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없지만 가석방 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형처럼 운영되고 있다.

1차 가석방 결정권은 법원에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도입되면 법원은 무기형을 선고할 때 가석방이 허용되는지 함께 선고해야 한다. 법원은 지난해 1월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 항소심에서 피고인 김태현에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선고하면서도 “가석방 여부는 행정부 결정 사안으로, 이 법원의 의견이 어느 정도 구속력을 가질지는 모르겠다”고 했었다.

다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아직 입법예고(8월 14일~9월 25일) 단계로, 향후 국무회의, 국회 심의·의결 등 최종 공포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남아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사형제가 사실상 사문화된 상황에서 무기수들이 가석방된다는 건 국민 실생활의 불안감과 함께 형사사법 체계와 공권력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의 경우 형벌 효과가 거의 없고 재범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사형의 대체형으로서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법무부가 선고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위헌·위법이기 때문에 법적 불안정성도 해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형조차 달성하지 못한 범죄 예방 효과를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달성하는 건 무리”라며 “수형자가 개선될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봉쇄해 교정 당국의 교정·교화 프로그램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석방 여부를 법관의 재량에 맡김으로써 판단의 위험성을 행정부가 아닌 사법부에 전가한 느낌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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